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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370

이인직, 언어의 마술사 서창에 지는 해가 눈이 부시도록 비추는데 창밖에 지나가는 그림자는 날아드는 저녁 까치라, 서창을 마주앉아 꼬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주동이를 딱딱 벌리면서 깟깟, 깟깟깟 짖기를 구기拘忌 잘하기로는 장안 여편네 중 제일 가는 김승지의 부인 시앗이니 무엇이니 하고 지향指向을 못하는 중에 저녁 까치 소리를 듣고 근심이 버썩 늘었더라... 인간에 새벽되는 소식을 전하려고 부상 삼백척에 꼬키오 우는 것은 듣기좋은 수닭소리라. 그 소리에 인간에 있는 닭이 낱낱이 운다. 아시아 큰 육지에 쑥 내민 반도국이 동편으로 머리를 들고 부상을 바라보고 세상밝은 기운을 기다리고 있는 백두산이 이리 굼틀저리굼틀 삼천리를 내려가다 중심에 머리를 다시 들어 삼각산 문필봉이 생겼는데 그 밑에는 황궁국도에 만호장안이 되었으니 종명정식하.. 2023. 6. 11.
춘천 중도가 출토한 고구려 금귀고리? 춘천 중도 출토 이른바 고구려계 금귀걸이와 같은 양상을 보이는 유물들이다. 보다시피 이상하리만치 이른바 고구려 무덤에는 한짝씩만 나온다. 그에 견주어 신라무덤인 황남대총에서는 쌍이다. 문제의 귀걸이가 출토된 곳은 사진에서 보는 석곽묘 바닥 비닐봉다리로 표시한 곳이다. 저 곳을 귀걸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본다. 모르겠다. 귀걸이라면 고구려 여인들은 성인은 쌍으로 걸고, 미성년은 외짝을 걸었는지도. (2015. 6. 10) *** related article *** 중도 출토 귀걸이는 귀걸이? 목걸이 펜던트? 중도 출토 귀걸이는 귀걸이? 목걸이 펜던트? 춘천 중도 유적 석곽묘 출토 귀걸이. 이른바 고구려 귀걸이라 해서 화제인 바, 이런 소위 고구려 귀걸이는 한결같이 한짝만 출토한다. 나는 귀걸이를 의심한다... 2023. 6. 10.
돌칼과 돌화살촉, 청동기물을 대체한 무덤의 장식물 중도 레고랜드 부지 6호 분묘(청동기시대 지석묘) 출토 돌칼이다. 바닥에 깔린 돌화살촉도 같은 무덤 일괄 출토품이다. 저 석기는 구석기 이래 석기가 자체 변형한 역사를 담은 몰골이 아니다. 눈치 깠는가? 동종 청동기물 번안품이다. 간단히 말해 청동 칼과 청동 화살촉을 그대로 본을 떠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저 돌칼과 돌화살촉과 그 모델인 청동칼과 청동화살촉의 관계는 이른바 방제경과 그 모델인 중국제 수입산 청동거울의 그것과 같다. 이 심각성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저런 돌칼과 돌화살촉은 명기明器다! 2023. 6. 10.
풍질로 주저앉은 총사령관 김유신 감국監國이란 글자 그대로는 나라를 돌본다는 뜻이니, 이는 비상시에 군주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을 대리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은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나 태자가 하지만, 그가 어리거나 병들거나 했을 적에는 중신(重臣) 중에서 명망이 높인 이를 골라 맡기기도 한다. 명망이 높아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비상사태에 반란을 억누를 수 있는 권위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이런 감국이 흔했을 것이나, 역사에서 확인하는 실례는 거의 없으니, 이는 기록의 소략함에서 기인한다. 그런 가운데서 역시나 김유신이 감국을 한 일을 발견할 수 있으니, 668년 고구려 정벌 전쟁에서 그가 수도 계림(혹은 금성이라도 했다)에 남아 감국을 했음이 확실하다. 문무왕 김법민은 아들을 늦게 본 듯하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5.. 2023. 6. 9.
나라를 비운 왕과 태자, 감국監國하는 김유신 문무왕본기엔 대 고구려 정벌 전쟁에 김유신이 풍질로 직접 참가치는 못했다 하지만 같은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3 김유신 하에는 그와는 언뜻 다른 듯한 사정이 거론됐으니, 병이 아니라 문무왕의 뜻에 따라 수도에 머물렀다 한다. 간단히 추리자면 나까지 수도를 비웠다가 수도에 무슨 일이 생기는 비상사태에 대처할 인물로는 김유신 밖에 없으니 그래서 문무왕이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감국의 역할을 김유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술, 그러니깐 출정에 앞서 김유신을 대신하여 총사령관 역할을 대신할 장군 김흠순과 김인문을 불러 문무왕이 하는 다음 언급에서 명확하다. “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의 땅으로 갔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다면.. 2023. 6. 9.
부여논산가도가 절단낸 부여나성 부여와 논산을 연결하는 도로는 식민지시대 개설되었다. 이 부여논산가도는 백제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결정타였거니와 이 도로 개설을 즈음해 비로소 부여 나성이 속살을 드러냈다. 나아가 가도가 지나는 근처를 따라 백제고분이 밀집한다는 사실도 비로소 드러났으니, 능산리 고분군이 문화재로 재발견된 것으로 이때였고, 그 인근 다른 고분군들도 이때서야 존재를 드러냈다. 언제 짬이 나면 이 가도의 역사 자체를 정리하픈 생각도 굴뚝처럼 솟아난다. 하지만 지난 1년, 하도 능산리에 질린 까닭에 당분간은 숨고르기가 필요할 듯하다. 첨부 유리건판 사진은 틀림없이 그 가도가 통과하면서 절개한 나성 동문, 능산리사지 인접 지점인 듯한데, 자신은 없다. (2017. 6. 8)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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