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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284

신라 가옥은 7세기까지 굴립주 건물이었다 이는 근자 간행된 신라사학회 기관지 《신라사학보》 37집에 기고한 이은석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실장의 논문 '7세기대 신라 가옥구조에 관한 고찰' 성과 결론이다. 이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저자 말마따나 이에 대한 심각한 고고학적 고민이 없거나 태부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논문은 의의가 있다. 두번째로 굴립주堀立住 건물이었다는 결론이 미칠 파장이다. 굴립주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별도 기초 시설이나 초석 없이 그대로 나무 기둥을 박아서 만든 집을 말한다. 이런 굴립주 건물은 그 기초가 남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나 경주 분지처럼 잦은 홍수로 가옥 지대가 침수되고, 나아가 그에 따른 재건축이 빈발한 지형에서 굴립주 건물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굴립주 건물은 저런 지형에서는 기초를 남기.. 2022. 9. 19.
신라라는 왕국, 그 도읍에서 선도산은 어떤 의미인가? 연전 경주서 두 시간 설을 푼 적 있으니 아래 영상이 그것이다. 혹 하릴없는 사람들은 심심풀이 땅콩 삼기 바란다. https://youtu.be/dF_pTR4zJRs 2022. 8. 17.
내가 말하는 내 박사논문 《관방체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전략 연구》 by 신광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오늘 뒤늦게 우체국을 방문해 사전접수라는 좋은 시스템을 이용해 겨우 우편 발송을 끝마쳤습니다. 다행히 상반기에 큰 사업이 없어서 우야부야 마무리했지만, 하반기 사업 때문에 논문을 다시 펼쳐볼 여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펼쳐보기 두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아마 이렇게 올 연말까지 또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갈테고, 그러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졸업 연한이 다 차서 부랴부랴 졸업 준비를 하다 보니 그저 아쉬움만 남는 것 같습니다. 박사논문 처음 정리할 때만 해도 그동안 썼던 글들 모아서 분량 채우고 중간중간 연결고리만 잘 정리하면 되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초고를 작성해.. 2022. 7. 24.
전두환 아들이 만든 책은 다 좋다, 무굴제국의 경우 "신성한 합일을 빛만큼 완벽하게 상징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슬람 예술가는 자신이 취급하는 재료를 빛의 진동으로 변형시키고자 했다." 이슬람 예술. T. 부르크하르트 이와 같은 요란한 띠지로 책은 대문을 연다. 부르크하르트 라 하면 웬지 와코 죽이는 효과가 있다. 암것도 아닌데 부르크하르트 라 하면 웬지 주눅들게 하는 그 어떤 힘이 있다. 독자를 짓누르겠다. 내가 뭔가 한 수 단단히 보여주겠다는 열망이 강할수록 저런 인용으로 출발하곤 한다. 주변 많은 이가 읽을 만한 책을 주문한다. 덮어 놓고 나는 말한다. 전두환 아들이 만든 책은 다 좋다 말이다. 그렇다.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는 하나하나가 다 주옥이다. 번역이며 그런 까닭에 번역의 안전성과 유려함이라는 점에서 불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우리 세대.. 2022. 7. 14.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현판 글씨 쓰다 백발이 된 중장仲將 위탄韋誕 우리의 삼국시대 중반에 해당하는 중국사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왕조 중 하나인 유송劉宋 시대 황족 일원 유의경劉義慶이 엮은 일화 모음집 《세설신어世說新語》 중 교예巧藝 제21에 세 번째로 수록된 일화가 다음이라 위중장은 글씨를 잘 썼다. 위 명제가 궁전을 세우면서 편액을 달고는 중장을 시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글을 쓰게 하고자 했다. (중장이 일을 마치고) 내려오니 머리카락과 귀밑머리가 허애졌다. 이 때문에 자식들한데는 다시는 글씨를 배우지 말라고 했다. 韋仲將能書. 魏明帝起殿, 欲安㮄, 使仲將登梯題之, 旣下, 頭𩯭皓然, 因敕兒孫, 勿復學書. 이것이 《世說新語》 본문이다. 이 일화 주인공 위탄韋誕(179~253)은 자를 중랑仲將이라 하는데, 저 이야기에서는 본명 대신 字로 등장한다. 경조군京兆郡 두릉현杜.. 2022. 7. 10.
최소 8개 목활자본으로 찍은 1901년 동의수세보원 동의수세보원 목활자본 두 쪽을 골랐다. 이에서만 用자가 8군데 쓰였다. 하나씩 본다. 살펴보니 새김이 다 다르다.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보통 조선시대 목활자본을 보면 필체가 크게 다르지 않다. 동일 자본字本으로 각刻을 하거나, 한 사람이 쓴 뒤 각수刻手가 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 사진처럼 같은 글자가 자체가 다른 것은 조판을 위한 목활자를 여러 곳에서 조달하여 사용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저 책을 찍은 시점이 1901년 광무 5년 시절인데, 한지 종이질이 좋지않은 것과 활자가 다 다른 것을 보면, 인쇄의 수요가 생각보다 많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 이상은 본래는 구석기 돌뺑이 전공이나 일찌감치 한국과학기술사 전반으로 보폭을 확장한 국립대전과학관 윤용현 박사과장 선생 글인데 전.. 202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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