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1832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관리, 아들은 인민군 포로 이 생활 좀 하다 보면, 이른바 기구崎嶇한 사연이라는 인연을 조금 만나게 되는데, 그런 기구崎嶇 중에 2013년 다음 기사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관리, 아들은 인민군 포로기사입력 2013.05.31. 오전 11:21 국립민속박물관·해금강테마박물관 '흥남에서 거제까지'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전쟁 와중에 헤어진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다. 재회한 곳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때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문관이었고, 아들은 북한 인민군 포로였다.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이 만남. 1951년 4월17일 아버지 최중훈 씨는 당시 열여덟살로 포로 신세인 아들 영철 씨를 찾아간다. 달걀과 돼지고기를 들고서 아들을 눈물로 면회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버지가 남긴 피난일기를 보면.. 2019. 5. 31.
김유신, 태대각간에서 흥무대왕으로 이 무덤이 김유신묘인가 아닌가는 논란이 적지 않다. 그것은 차치하고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조선후기, 아마도 영조연간이던가? 그때 세운 묘표墓表에 이 무덤을 일러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라고 했다는 점이다. 왜 흥무대왕릉興武大王陵이라 하지 않았을까? 이미 김유신은 그 시기를 확정하긴 곤란하나, 신라말기에 흥무대왕에 추봉된 이래 줄곧 흥무대왕이었으며, 특히 김해김씨 종문宗門에서는 더 그랬다. 그럼에도 대각간 김유신묘라고 한다. 이 점이 수상쩍기만 하다. 김유신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된 시기는 언제인가? 내가 일전에 이를 정리한 적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 흥덕왕代(826~836)삼국유사 : 경명왕代(917~924)삼국사절요 : 경명왕 7년(923)동국통감 : 흥덕왕 10.. 2019. 5. 30.
매형공주妹兄公主와 백제 창왕 부여 능산리 사지陵山里寺址 목탑지 출토 이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전면에는 양쪽 줄에 걸쳐 百濟昌王十三年季太歲在 /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 / 는 줄 바뀜을 의미) 라는 문구가 확인되거니와, 이는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능산리 백제시대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저 문장은 백제 창왕 13년, 간지로는 정해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는 뜻이거니와, 이를 통해 이 절을 창건한 대단월이 매형공주임을 안다. 이 절을 창왕이 직접 창건한 것으로 간주하는 글이 많고, 그에 따라 이를 근거로 하는 논설이 부지기에 이르는데 개소리다. 이 절을 창건한 주체는 분명히 '妹兄公主'다. 이 절을 창건한 백제 창왕 13년, 간지로는 정해년은 567년.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연표를.. 2019. 5. 29.
문고리에서 돌쩌귀로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대문大門 문고리다. 한때 문고리라는 말이 대유행한 적이 있다. 저 문고리. 겨울철이면 손가락이 쩍쩍 들어붙었다. 문고리보단 돌쩌귀 같은 사람이어야지 않겠는가? 돌쩌귀는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묵묵할 뿐이다. 문고리가 없으면 밀어 열면 되지만 돌쩌귀가 없으면 문이 존재할 수가 없다. 2019. 5. 20.
귀수龜首와 귀두龜頭, 그 sexual connotation 무엇을 닮았는가? 귀두龜頭다. 남자의 음경陰莖이다. 이 귀두를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할 적에 불렀다는 노래 구지가龜旨歌에서는 일러 귀수龜首라 했거니와 "首, 頭也" "頭, 首也"라 《설문說文》에서 일렀다. 이런 귀두를 볼 적에 키 포인트는 목주름이다. 하긴 이 목주름을 요새는 포경수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살하는 일이 종종 있다. 거북, 특히 그 대가리는 짙은 섹슈얼 코너테이션이 있음을 하시何時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성姓 담론을 수면 위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일환으로 거북 대가리 귀두龜頭가 실은 남자의 음경 그 귀두龜頭임을 언제나 힘주어 강조했다. 두 단어가 한자가 같은 까닭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지칭하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다. 일전에 나는 어떤 글(아래 참조).. 2019. 5. 20.
이왕팔사마二王八司馬와 영정혁신永貞革新, 특히 유종원과 유우석 제목이 말하는 이 사건은 비단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중국문학사에서 중대한 위치를 점한다. 당 제국이 무너져 가는 중당中唐 말기, 그 무너지는 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며 개혁 혹은 혁명을 표방한 그룹이 나타났으니, 그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 중에 우두머리가 공교롭게도 두 왕씨이며, 이들을 뒷받침하며 혁신 그룹에 속한 젊은이 8명이 정변이 실패한 뒤에 모두 사마로 좌천된 까닭에 이 혁신, 혹은 반동을 주도한 이들을 싸그리 뭉뚱거려 2왕 8사마라 한다. 이들이 이런 혁신, 혹은 반동을 실행한 때가 당唐 순종順宗 영정永貞 원년(805)이라 해서, 그 혁신 운동을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 부른다. 물론 이들은 혁신 혹은 개혁을 표방했지만, 그에 반대해서 집요하게 그들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마침내 권세를 회복한 사람들 눈에는 .. 2019. 5. 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