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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7

신라사 최대 미스터리 금성金城, 그것이 있을 곳은 지구상 오직 하나 월성이 왕궁으로 기능하기 전, 혹은 그것이 건설되기 전, 나아가 그것이 건설되고서도 한동안 같이 왕궁으로 기능한 금성金城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천년왕국 신라의 정궁正宮이요 법궁法宮이다. 그것을 증언하는 기록들을 보면 월성보다 금성은 규모가 컸다. 그렇지만 그 기록 자체에 모순투성이라, 무엇보다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그렇지만, 금성이 포진할 수 있는 데는 지구상 딱 한군데 밖에 없다. 좁에 잡으면 앞, 넓게 잡으면 아래쪽이 금성이 포진하는 범위다. 이쪽 지역을 금성 후보지로 지목한 이는 더러 있다. 이건 내가 그들의 견해를 따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가 관련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성과들을 비교해 검토할 적에 때려죽여도 금성 위치는 저 범위에 포진한다. 2022. 12. 22.
[유성환의 AllaboutEgypt]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 (10) 투탕카멘의 사인 - 국왕살해의 범인은 누구인가 (2) 투탕카멘 Tutankhamun (재위 기원전 1336~1327) 사후 왕위에 오른 인물은 아이 Ay (재위 기원전 1327~1323)와 호렘헵 Horemheb (재위 기원전 1323-1295)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소년왕을 살해한 범인들일까요? 롱아일랜드 대학 Long Island University 선임연구원 밥 브라이어 Bob Brier (1943년-현재)는 투탕카멘을 시해한 범인으로 아이를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역시 투탕카멘을 살해할 이유가 거의 없는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여러 정황 증거를 근거로 학자들은 아이를 아멘엠하트 4세/아켄아텐 Amenhotep IV/Akhenaten (재위 기원전 1352~1336) 어머니인 투야 Tuya 형제, 그리고 / 혹은 왕비 네테르타리 N.. 2022. 12. 19.
외과수술 받으며 술을 마신 관우 관우는 일찍이 화살에 맞아 왼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훗날 상처는 차츰 나았으나 매번 흐리고 비오는 날이면 늘상 통증에 시달렸다. 의원이 “화살촉에 독이 있어 독이 뼈속으로 들어가 팔을 가르고 째서 뼈를 긁어내 독을 제거해야만 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관우가 바로 팔을 펴서 의사에게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잔지를 벌였는데 팔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려 그릇에 가득 찼는데도 관우는 고기를 뜯고 술 마시며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삼국지 관우전 한 대목(소설 아니고 정사임)이다. 소설에서는 여기에 동진 사안謝安의 이미지를 얹히고 싶었던 듯하다. 타구 같은데 피 받아가며 갈비 뜯고 술퍼마시는 괴랄한 장면보다는 바둑을 두는 모습이 더 고결해 보였으테니. 춘추를 지물로 들고.. 2022. 12. 17.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9) 투탕카멘의 사인 - 국왕 살해 범인은 누구인가 (1) 1932년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가 왕묘 정리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유물이 카이로고고학박물관(Museum of Egyptian Antiquities)에 운송될 때까지 약 54,000점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발굴작업 전후에도 식을 줄 몰랐고 이제 대중의 관심은 ‘소년왕’이 약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집트를 다스리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쏠리게 되었습니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묘가 발견된 지 3년 후인 1925년 11월 11일 투탕카멘 미라에 대한 부검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라 보존 상태가 상당히 나빴기 때문에 부검을 맡은 더글러스.. 2022. 12. 16.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8) 끝없는 갈등과 쓸쓸한 말년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년) 경의 미망인 알미나 허버트 카나본 백작부인(Almina Herbert, Countess of Carnarvon: 1876-1969년)은 카나본 경이 사망한 후에도 발굴작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발굴 허가권 시한을 연장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따라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가 현장을 계속 통제하면서 발굴작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카터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발굴현장이 아니라 정치 대외적 상황들이었습니다. 특히 카나본 경이 「타임즈」(The Times)와 체결한 독점 보도권으로.. 2022. 12. 15.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7) 본격화하는 발굴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년) 경이 1923년 4월 5일 사망하기 약 한 달 전인 2월 28일에는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 왕묘(KV 62)의 묘실(burial chamber)이 마침내 개방되었습니다. 왕묘가 발견되고 발굴팀이 꾸려지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는 1922년 12월 27일부터 전실(antechamber)의 유물을 수습하여 카이로의 박물관으로 보내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유물이 왕묘 밖으로 운반되면 람세스 11세(Ramesses XI: 기원전 1099-1069년)의 왕묘(KV 6)에..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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