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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남당南堂ㆍ도당都堂ㆍ명당明堂ㆍ신궁神宮, 그리고 나정蘿井 3회에 걸쳐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를 통해 2005년 8월에 송고한 같은 제목 기사는 마침 당시 박혁거세 탄강지인 경주 나정 발굴성과에 즈음해 이곳이 틀림없는 나정이요 신궁임을 확신하는 내용으로 점철한다. 내가 언젠가 말했듯이 신궁을 나만큼 아는 사람 단군조선 이래 이 지구상,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나정은 발굴결과 우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남에 따라, 신라시대 나정이 아니라는 문제제기도 이후 이은석 선생을 비롯해 몇몇에 의해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제목에서 열거한 저런 정사당政事堂 겸 제장祭場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한다. 지금의 경주 나정은 신라시대 그 나정임에 틀림없고, 더구나 그에 들어선 제장은 신궁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신궁이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아는 이가 많지만, 웃기는 소리다. ..
다시 만난 이한열 연세대 신촌캠퍼스 학생회관이다. 모르겠다. 내가 다닐 땐 학생회관이었는데 지금도 그리 부르는지는. (다시금 사진을 보니 학생회관 맞구만) 암튼 이 학생회관에 한열이 대형 걸개판화가 걸렸다. 이 그림 자신은 없으나 그때 그 그림이다. 32년전 그 그림이다. 누렇게 뜬 상태를 보니, 더 그런 심증을 굳혀준다. 이 걸개그림이 남았다니, 더구나 그 그림을 30년이 더 지나 마주하니 한 대 얻어맞은 듯 띵 하다. 내 세대, 특히 한열이와 같은 시대, 그와 같은 공기를 같은 캠퍼스에서 호흡한 이들한테 이 그림은 뭐랄까? 언제나 트라우마다.경찰이 쏜 최루탄 맞아 백양로에서 피흘리는 한열이를 부축하는 이 그림은 이미 한열이가 세상을 떠난 1987년에 걸렸다. 몇년 전이었다. 그때 모교 재상봉행사가 있어 참석했더니 저 ..
전쟁에 남자 씨는 마르고, 넘쳐나는 과부들은 고육지책으로..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전쟁은 성별로 구분하자면 특히 남자 씨를 말린다.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태평양전쟁기에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남학생은 인기가 좋았다고 하는 증언을 본 기억이 있거니와, 전장터로 나간 남자가 몰살한 반면 젊은 처자는 넘쳐난 까닭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이 전쟁기와 전쟁이 끝난 무렵 두 나라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다처제를 적극 권유했다고 안다. 남자는 없고 여자는 넘쳐나니,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남자 하나가 최대 4명까지 마느래를 둘 수 있는 제도에 호소했던 것이다. 발칸반도...유고슬라비비아는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았거니와, 기나긴 내전 혹은 전쟁은 남자들 씨를 말렸다. 일부다처제 말고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다른 현상이 있으니, 전쟁에 희생되지 않은 어린아해들을 남편으..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관리, 아들은 인민군 포로 이 생활 좀 하다 보면, 이른바 기구崎嶇한 사연이라는 인연을 조금 만나게 되는데, 그런 기구崎嶇 중에 2013년 다음 기사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관리, 아들은 인민군 포로기사입력 2013.05.31. 오전 11:21 국립민속박물관·해금강테마박물관 '흥남에서 거제까지'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전쟁 와중에 헤어진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다. 재회한 곳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때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문관이었고, 아들은 북한 인민군 포로였다.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이 만남. 1951년 4월17일 아버지 최중훈 씨는 당시 열여덟살로 포로 신세인 아들 영철 씨를 찾아간다. 달걀과 돼지고기를 들고서 아들을 눈물로 면회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버지가 남긴 피난일기를 보면..
김유신, 태대각간에서 흥무대왕으로 이 무덤이 김유신묘인가 아닌가는 논란이 적지 않다. 그것은 차치하고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조선후기, 아마도 영조연간이던가? 그때 세운 묘표墓表에 이 무덤을 일러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라고 했다는 점이다. 왜 흥무대왕릉興武大王陵이라 하지 않았을까? 이미 김유신은 그 시기를 확정하긴 곤란하나, 신라말기에 흥무대왕에 추봉된 이래 줄곧 흥무대왕이었으며, 특히 김해김씨 종문宗門에서는 더 그랬다. 그럼에도 대각간 김유신묘라고 한다. 이 점이 수상쩍기만 하다. 김유신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된 시기는 언제인가? 내가 일전에 이를 정리한 적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 흥덕왕代(826~836)삼국유사 : 경명왕代(917~924)삼국사절요 : 경명왕 7년(923)동국통감 : 흥덕왕 10..
매형공주妹兄公主와 백제 창왕 부여 능산리 사지陵山里寺址 목탑지 출토 이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 전면에는 양쪽 줄에 걸쳐 百濟昌王十三年季太歲在 /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 / 는 줄 바뀜을 의미) 라는 문구가 확인되거니와, 이는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능산리 백제시대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저 문장은 백제 창왕 13년, 간지로는 정해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는 뜻이거니와, 이를 통해 이 절을 창건한 대단월이 매형공주임을 안다. 이 절을 창왕이 직접 창건한 것으로 간주하는 글이 많고, 그에 따라 이를 근거로 하는 논설이 부지기에 이르는데 개소리다. 이 절을 창건한 주체는 분명히 '妹兄公主'다. 이 절을 창건한 백제 창왕 13년, 간지로는 정해년은 567년.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연표를..
문고리에서 돌쩌귀로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대문大門 문고리다. 한때 문고리라는 말이 대유행한 적이 있다. 저 문고리. 겨울철이면 손가락이 쩍쩍 들어붙었다. 문고리보단 돌쩌귀 같은 사람이어야지 않겠는가? 돌쩌귀는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묵묵할 뿐이다. 문고리가 없으면 밀어 열면 되지만 돌쩌귀가 없으면 문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귀수龜首와 귀두龜頭, 그 sexual connotation 무엇을 닮았는가? 귀두龜頭다. 남자의 음경陰莖이다. 이 귀두를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할 적에 불렀다는 노래 구지가龜旨歌에서는 일러 귀수龜首라 했거니와 "首, 頭也" "頭, 首也"라 《설문說文》에서 일렀다. 이런 귀두를 볼 적에 키 포인트는 목주름이다. 하긴 이 목주름을 요새는 포경수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살하는 일이 종종 있다. 거북, 특히 그 대가리는 짙은 섹슈얼 코너테이션이 있음을 하시何時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성姓 담론을 수면 위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일환으로 거북 대가리 귀두龜頭가 실은 남자의 음경 그 귀두龜頭임을 언제나 힘주어 강조했다. 두 단어가 한자가 같은 까닭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지칭하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다. 일전에 나는 어떤 글(아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