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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전리품으로서의 수급首級 사마씨 천의 《사기史記》 이래 기록을 보면, 적의 수급首級을 베었다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예서 首는 말할 것도 없이 대가리다. 말 그대로 대가리를 땄다는 말이다. 한데 왜 급수 급級인가? 대가리 하나 따올 때마다 특진을 시켜줬기 때문이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무식하게 보이지만, 이 수급으로써 특진을 꿈꾸는 자는 많았고, 실제 그리해서 출세한 자가 적지 않다. 이 특진은 강고한 기성 신분제의 탈출 해방구이기도 했다. 물론 이 수급을 통한 특진을 꿈꾼 자들 대다수가 실은 그네 자신의 목이 달아났지만 말이다. 강고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더는 출세 못하겠다고 판단한 설계두薛罽頭는 당唐으로 탈출해 신분상승을 꿈꾸었으니, 그가 채택한 방식이 수급 획득을 통한 출세였다. 당 태종 이세민이가 고구려 정벌군을 일..
예멘 난민으로 보는 고대 민족이동과 주류의 교체 요새는 이 문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작년 이맘 때만 해도 제주도로 몰려든 예멘 난민 사태로 그 난민 처우를 둘러싼 논란이 극심했다고 기억한다. 이 사태를 둘러싼 논란 전개 양상을 보면, 여러 성찰을 요구한다고 나는 본다. 그런 성찰들과는 별개로 나는 내가 오래도록 궁금해한 의뭉스러움 중 하나를 풀 단서를 푼다고 본다. 무엇인가? 나는 오래도록 역사에 아주 자주 보이는 민족 이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번 사태를 보니 고대 민족 이동의 여러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예컨대 민족 이동은 출발지 주체의 관점에서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을 생각해야 한다. 예멘에서는 왜 난민이 발생했던가? 둘째 어사일럼asylum 주체의 관점이다. 저들 난민을 대하는 토착사회, 재지在地사회의..
대가야, 기자를 만나지 못해 매몰한 500년 고대왕국 어느 정도 역사적 실상에 부합하는지는 차치하기로 한다.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해서 작성한 대가야 영역이라 해서 대가야 전문박물관을 표방하는 고령 대가야박물관에서 내건 지도다. 이것이 시간이 누층한 결과인지, 다시 말해 시기를 달리하는 대가야 흔적인지, 아니면 특정 시기 대가야 흔적인지는 내가 모르겠다. 나아가 저들 지역에 대가야 영향이 농후한 고고학적 성과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치역학의 관점에서 직접 지배 흔적을 말하는지, 혹은 문화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저 강역의 사실성 여부와는 별도로 대가야라는 왕조가 한때 이 한반도에 존재했고, 그 존속기간은 물경 500년에 달하지만, 그들의 활동상을 전하는 기록이 전무에 가깝다는 섬뜩함이다. 대가야는 《삼국사기》 《삼..
제도로서의 문화재는 1915년 부여 능산리고분군에서 도쿄제국대학 조교수 구로이타 가쓰미가 시작했다 능산리 고분을 이야기할 때, 1915년 7월, 구로이타 카쓰미黑板勝美(1874~1946) 조사 자료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그의 조사성과는 이듬해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제출한 복명서復命書에 보인다. 이 복명서는 1974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비로소 공개되었다. 이 복명서 존재를 국내 연구자는 대체로 안다. 한데 이 복명서를 언급하면서 구로이타 자신이 작성한 각종 실측도면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 점이 기이할 뿐이다. 이번에 졸저를 내면서 그의 실측도면은 내가 모조리 실었다. 이 실측도면 중 이 능산리 고분군에 이르는 백제시대 참도參道가 있다는 언급이 보이는데, 그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몰라도 불행 중 다행으로 그가 그린 참도 부분은 파괴되지 않았으니 그 확인을 위한 트렌치 조사..
8개월만에 해 치운 신도시 건설, 수隋 대흥성大興城의 경우 **** 2008년 7월 16일 지금은 사라진 내 블로그 포스팅이다. 양견楊堅은 북주北周를 대체해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소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隋 왕국을 창건하거니와, 창건 직후에는 北周가 종래 사용한 장안성長安城이 비좁다 해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거니와, 이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같은 장안의 용수산龍首山이란 곳이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아는 중국 음식점 중에 용수산이 있는데 혹여 이에서 따왔는지 모르겠다) 통상 新왕조 건국과 함께 다른 곳에다가 도읍지를 물색함은 상례지만, 그래서 대체로 중국에서는 낙양洛陽과 서안西安(장안長安)을 왔다리갔다리한 까닭이 이에서 말미암는다. 그래서 두 도시는 이미 前漢 시대에 동도東都(혹은 동경東京. 낙양)와 서도西都(혹은 서경西京. 장안)이라 불리거니와, 그러..
한달만에 해치운 한양도성 축성 《세종실록世宗實錄》 148권, 지리지地理志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한 대목이거와, 현재 우리가 서울도성 혹은 한양도성이라 일컫는 그 거대한 공사 축성 과정을 집약 정리한 것이다. 번역은 문맥을 부드럽게 하는 수준에서 내가 손을 조금 봤다. 도성都城은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는 지름이 4천3백86보가 된다.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한다. ..
대원군 서원훼철령에서 살아남은 47곳 고종실록 8권, 고종 8년 3월 20일 경술 4번째기사 1871년 조선 개국(開國) 480년 전국의 서원 중에서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폐하다 예조(禮曹)에서, ‘한 사람에 대해 중첩하여 세운 서원(書院)을 헐어버리는 문제는 두 차례의 하교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나아가 품의(稟議)한 결과, 「성묘(聖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제현(諸賢)과 충절(忠節)과 대의(大義)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미 사액(賜額)하여 계속 남겨두어야 할 47개의 서원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한 뒤 각도(各道)에 행회(行..
무령왕릉에 관련된 인물들 1. 윤주영...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이 30주년을 맞은 2001년, 나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주무 장관이셨는데, 혹 당신이 무령왕릉 발굴을 지시하셨냐 라는 등등을 물었다고 기억한다. 예상대로 그는 이 발굴과 관련한 의미심장한 증언은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조선일보 무슨 고문인가로 있었다. 1928년생, 만 91세인 그는 요즘도 모임 같은 데 간혹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2. 김원룡...당시 국립박물관장이었다. 느닷없는 발굴책임자로 낙점되어 한국고고학, 아니 세계 고고학 사상 유례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하 생략 3. 안승주...무령왕릉 발굴 당시 당장 무령왕릉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창한 공주 지역 역사학계 주축 중 한 명이다. 나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