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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2

광개토왕비는 장수왕의 친정親政 기념비 2011년 11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자, 그 후' 특별전 개최와 맞물려, 그날 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나는 '광개토왕비,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라는 발표를 했다. 이 발표문은 이후 한국고대사탐구학회 기관지에 정식 논문으로 공간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이에서 나는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이른바 광개토왕비에서 능陵과 묘墓라는 글자가 엄격히 구별돼 사용되니, 전자가 광개토왕릉임에 견주어 후자는 이를 포함한 고구려 선대 왕릉 전반을 포함하는 왕가 전체의 묘역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비는 광개토왕릉이라는 단일 왕릉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고구려 전체 왕릉 묘역 수호를 위한 법령 포고비다. 둘째, 나아가 이들 왕가 묘역 전체 관리를 위해 광개토왕의 존시교언存時.. 2020. 11. 20.
왕건의 국정원장 복사괴卜砂瑰 복지겸卜智謙...일명 복사괴卜砂瑰 이 양반 행적을 보면 매우 요상한데 주전공은 국정원장. 불평분자 색출이 그의 주업무였으니, 블랙리스트 만들어 왕건한테 출세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비롯하는 면천 복씨沔川卜氏로 근자에 가장 출세한 이가 복기대다. 천안에 웅거하면서 고조선을 들었다놨다 하는 중이다. 아산시장 복기왕도 복지겸 후손이다. 충청도에 유독 면천복씨가 많은 까닭은 바로 복지겸이 분봉받은 땅이 면천 일대에 집중하는 까닭이다. 이 면천복씨 집안 땅은 그 내력이 무려 천년이다. (2017. 11. 19) *** 《고려사》 권92 열전列傳 권 제5 제신諸臣에 복지겸卜智謙을 일러 이렇게 말한다. 처음 이름은 사괴砂瑰다. 환선길桓宣吉·임춘길林春吉이 반란을 도모하자, 복지겸이 모두 몰래 고하니 그들을 주살했다. 죽.. 2020. 11. 19.
12.12와 백제금동대향로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발견 시점이 1993년 12월 12일이다. 이에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에 간접 관련되는 사람들이 날짜를 기억하는 방식은 12.12 사태에서 비롯한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승화 육참총장을 몰아낸 그날이 12.12다. 그날 오후 늦게 능산리에서 향로가 발견되고, 그날 저녁 9시쯤에 이 소식을 연락받은 사람들이 있다. 서오선은 당시 국립공주박물관장이었다. "승님은 발굴단도 아닌데 어째 날짜까지 기억하오?" 했더니 서오선 왈... "12.12자나. 어떻게 그 날짜를 잊어버려?" 라고 한다. 이날 저녁 연락받은 외부 인사가 또 있다. 윤무병. 그 역시 비슷한 말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과 그에 따른 문화재연구소 현지 출장 날짜가 아마.. 2020. 11. 17.
서간문이 폭로한 연암 박지원의 내면 2005.06.02 05:01:27 (1) 궁상맞은 늙은이에서 자상한 아버지ㆍ할아버지 박제가ㆍ유득공에 대한 애정어린 비평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해 가을 내 화포 두루마기를 유득공에게 빌려 주었다. 이번 수군(水軍) 조련 (훈련) 때 마땅히 철릭 아래에 받쳐 입어야겠으니 즉시 찾아와 보내주는 것이 어떠하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득공에게 보내준 두루마기 돌려받아 달라 부탁하는 주인공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1797). 당시 그는 면천군수였다. 환갑이 된 노인네가, 명색이 그것도 군수나 되는 사람이 궁상맞게 제자격인 유득공(柳得恭.1749-1807)에게 빌려준 두루마리를 돌려받겠다고 나서고 있다. 더 웃기는 건 그것을 돌려받으려는.. 2020. 11. 16.
부석사 무량수전의 진실을 찾아서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던 '부석사 사적'은 현재 남아 있는지조차 알수 없다. 아마 없어져서 더 이상 세간에 출현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하지만..... 암튼, 안보이든 사라졌든 그 사적을 제외하고 1945년 해방 이후 1970년대 까지 부석사 관련 사적의 흔적으로 세 가지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실물은 고사하고 복사본도 못봤다. 암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어지간히 검색 조사한 결과 1.1955년 부석사 전 주지였던 권계한權啓漢의 '부석사연혁사浮石寺沿革史'.(1955년) 2.부석면에 살았던 김진영金進英의 '부석사사적浮石寺事蹟'(1976년) 3.황수영 박사의 '부석사사적초'(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사적의 초안을 작성하셨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다). 이후.. 2020. 11. 15.
줄과 간격을 맞추기 위한 선간지線間紙 전통시대 인쇄문화 주종은 직접 손으로 베끼는 필사筆寫다. 붓으로 열라 베끼니 손모가지 나가고 것도 오십견 오면 불가능하다. 금속활자나 목판인쇄? 웃기고 있네. 돈 열나 먹는 하마라 그거 하나 만들다 집안 거덜난다. 책값? 졸라 비싸다. 결국 빌려다가 열나 베낄 수밖에 없는데 드라마나 영화 보면 열나 속도 빠르지만 실제 하루 몇 글자 베끼지도 못했다. 필사는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그건 그렇고 다들 놀랜다. 이 친구들은 베낀 것도 언뜻 활자와 구분이 쉽지 않아 무엇보다 글자가 단 한 치 흐트러짐도 없고 무엇보다 오와 열이 딱딱 맞아 삐뚤어진 글자 하나 없다. 그네들이 천부적 감각이 있어서? 좃까. 그들이라고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자를 잰듯이 저리 했겠는가? 다 사기다. 밑창에 저런 걸 다 깔고 베꼈다. 그..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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