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태형 송광사성보박물관
아마도 누군가 나와 같은 답을 내 놓은 연구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조선시대 불상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각상의 구조적 문제에 있었다.
바로 목 부분이다.
삼국시대, 통일전기 불상들을 보면 대부분 삼도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뒷목도 일정 부분 표현해 인체의 비례를 맞추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삼도는 나타나지만 뒷목이 점점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석조든 소조든 이는 불상이나 다른 인체 조각상이 지닌 치명적인 결점이자 문제였다.
앞 사진 부석사 무령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의 경우 뒷목 부분이 잘 남아 있다.
하지만 1624년 이 송광사 응진당 소조석가여래좌상처럼 뒷목이 사라지고 구부정한 자세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봉화 오전리 석불의 경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불두가 사라진 상태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조선 아니 고려, 그 이전에도 계속되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도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런 문제 인식이 있어 14세기 전후로 몸이 좀 구부정한, 목이 사라지거나 있는둥 마는 둥 흔적만 남긴 퇴화한 목이 얼굴을 받치는 불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각상의 목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효과가 있어 대대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소조, 석조를 필두로 목조, 금속 등의 재료를 이용한 불상들에서 거북목과 같은 형태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와 관련 간혹 석불의 경우 불두가 사라진 목부분에 사각형 홈이 파인 경우가 있다.
사실 처음에는 후대에 보수한 흔적이 아닐까 했는데, 이는 조각 당시 목부분이 떨어져 궁여지책으로 불두를 결합한 흔적이다. 후대 보수의 확률은 지극히 적다고 본다.
제작 당시의 결함,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조각을 특히 인체조각을 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하리라 본다.
석불의 제작과정에서 목 뒤를 가공하면서 힘의 조절이 엇나가거나 석재의 근본적인 문제로 즉 보이지 않았던 크랙으로 인해 불두가 분리되는 현상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경주 분황사 우물에서 발견된 다량의 목이 없는 석불들을 잘 살펴보면 미완이면서 불두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는 억불의 결과가 아니라 제작 당시 문제가 있었던 불상들의 파기 혹은 몽고란 때 몽고군이 이를 재활용해 유물을 메꾼 것이라고 보는게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다.
결론을 말한다면 조선시대 불상이 구부정한 거북목을 취한 것은 억불 때문이 아니라 당시 유행한 불상 양식이었고 그 원인은 조각상의 치명적인 약점인 목부분을 보강하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아니 그렇다.
***Editor's Note ***
불단에서 원인을 찾는 글을 본 듯하다. 곧 불단에서 예배자를 내려다 보고자 저런 구조가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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