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2945

삼척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울릉도, 우산국은 생각보다 더 가깝다 하도 동해안, 그리고 울릉도 얘기를 쏟아내니 경주에서 맹동에 옴짝달짝 못하고 방구석 신세인 오세윤 형이 틱 하니 카톡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르기를 "울릉도에서 대관령 잘 보인다." 하는 게 아닌가? 잉? 대관령이 잘 보인다고?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내가 하는 고민 일거에 해결하는데? 하고선 다시 다그치니 신경질을 내면서 이르기를 "내가 봤다니깐?"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대관령? 강릉 주재 남대천 철새 특파원 우리 공장 유형재 형한테 기별을 넣어 "승님, 블라블라 울릉도 사진 있소?" 했더니만 본인은 찍은 적이 없고 삼척에서는 울릉도가 가끔 육안으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우리 공장 DB를 돌려봤다. "삼척+울릉도"라는 키워드를 넣으니 잉? 이게 뭐란 말인가? 앞에 부친 사진, .. 2022. 12. 24.
강원관찰사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이 증언하는 강릉 사람들 강릉·원주 풍속기〔記江陵原州風俗〕 성현成俔, 《허백당문집虛白堂集》 제3권 / 기記 대체로 사람의 상정常情은 척박한 땅에 살면 부지런해지고 비옥한 토양에 거처하면 안일해지기 마련이다. 위魏 풍속은 검소하고 인색하며 연燕·조趙에는 굳세고 과감한 선비가 많았으니 그 땅이 변새邊塞와 연접해 산이 높고 물살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은 성정이 모두 참을성이 강하며 질박하고 정직하여 근본에 힘쓰고 말단을 좇지 않는다. 반면 정鄭과 위衛는 음탕하고 제齊 풍속은 사치하고 큰소리로 남을 속이며 강동江東 지역 사람들은 나약하여 떨쳐 일어나 분발하려는 의지가 없으니, 그 산세가 완만하고 물이 느릿느릿 흐르며 거주지가 해안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정이 태만하고 소극적이며 본업에 힘쓰지 .. 2022. 12. 24.
진흥왕시대 신라 영역은 지도가 축소됐다 진흥왕 시대 신라의 국경선은 최소가 이것이다. 기존에 저 시대 신라 영역이라 표시된 지도는 다 오류다. 보통 이딴 식으로 그리곤 하는데, 왜 오류인가? 저 지도대로라면 진흥왕이 지들 국경선 끄터머리에 서서 여긴 우리 땅이라 표시한 셈이 되거니와,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실제 같은 순수비인 북한산 비봉비 역시 신라 영역 복판이었다. 순수비는 아니지만, 그와 성격이 비슷한 창녕비도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모조리 신라가 장악하고서 그 복판에다가 세운 것이다. 한데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만큼은 지금의 휴전선 혹은 DMZ 같은 데다 적들을 바라보며 성대한 의식을 하면서 그 끝에다가 저걸 세웠다고? 어떤 놈이 저 따위 망발을 일삼는가?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저것을 세운 지점 주변 넓은 땅이 신라 .. 2022. 12. 24.
화외化外로서의 여진과 탐라, 고려가 발명한 야만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을유 8년(925), 후당 동광 3년ㆍ거란 천찬 4년 ○ 11월에 탐라(耽羅)에서 지방의 산물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신묘 14년(931), 후당 장흥 2년ㆍ거란 천현 6년 ○ 이해에 안북부(安北府)와 강덕진(剛德鎭)을 설치하고 원윤(元尹) 평환(平喚)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왕이 유사에게 이르기를, “북번(北蕃) 사람은 얼굴은 사람꼴이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아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을 보면 부끄러움도 잊는다.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지마는, 따르거나 배반함이 일정치 않을 것이니 마땅히 지나가는 주ㆍ진에는 관사(館舍)를 성 밖에 지어서 그들을 접대하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 2022. 12. 24.
조선 세조시대 양성지의 삼국사기 독후감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일(임오) 2번째기사 양성지가 군법·군정·군액·군제·사역에 관한 일로 상서하다 군정軍情을 보살피는 일. 신臣이 평일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중국인[漢人]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일곱 번 이기고, 왜인倭人과 싸우면 열 번 싸울 때 세 번 이기고, 야인과 더불어 싸우면, 열 번 싸울때 다섯 번 이깁니다.’고 했다. *** 양성지梁誠之는 생몰년이 1415~1482이라, 이른바 사육신, 그리고 수양대군과 대략 동시대를 태어나 그들과 동시대를 호습했으니, 그는 특히 역사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전기 문물 흥성에는 그가 빠지지 아니했다. 2022. 12. 24.
마운령, '그 너머'로서의 상징과 실질 세종 3년 신축(1421) 2월 7일(경자) 함길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단천端川 기원역碁原驛에서 시리역施利驛에 이르는 동안에 잇수[里數]가 매우 멀고, 또 마운령磨雲嶺을 넘는데 고갯길이 높고 험하여,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옵는데, 고개 아래에 옛 관館 터가 있사오니, 합배合排를 설치하여 부근 민호民戶를 거기에 부속시키게 하고, 또 홍원洪原 평포역平浦驛에는 역리驛吏가 한두 호戶에 지나지 못 하오니, 바라옵건대, 민호民戶를 뽑아 합배를 설치하여 도와주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423 면 【분류】 교통-육운(陸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주-D001] 합배(合排) : 역(驛)은 아니나, 역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는 곳임. 세종 27년 을축(.. 2022. 12. 2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