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2407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 논문 쓴다고 비봉碑峰에 몇번 올랐다. 보다시피 온통 암반이라, 이 일대에서는 조난사고가 요즘도 심심찮고, 사망에 이르는 일이 많다. 그만큼 험준한 곳이다. 이건 촬영일이 2011년 10월 16일이라고 찍힌다. 그 전에 이곳에 처음 올랐을 적에 나는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대한 기존 해설이 모조리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종래의 압도적인 견해로는 신라 진흥왕이 유가적 왕도정치儒家的王道政治를 표방하기 위해 북한산으로 순수巡狩를 하고는 그 기념으로 이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내가 본 북한산 비봉 현장은 유가적 왕도정치를 표방하거나, 선전할 수 없는 험준한 바위산이었다. 그렇다면 왜 진흥왕은 이런 데 행차했는가? 천신天神과 지기地祇를 제사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천신을 제사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가.. 2019. 10. 18. 직인을 위조하는 자는 능지처참 《경국대전》 [僞造] 僞造印信者, 印文雖未成, 處斬, 妻子, 永屬諸邑奴婢。捕告者, 給犯人財産。 직인을 위조하는 자는 설혹 그 직인 글자가 완성되지 못했다 해도 본인은 능지처참하며, 그 처자는 각 고을 노비로 삼는다. 그런 놈을 산 채로 잡아 고하는 사람은 범인의 재산을 준다. 도장 위조하지 마라. 이 자료는 행주기씨 호철씨 글을 옮겨와서 옮긴다. 2019. 10. 17. 상식으로 접근하는 역사, 인질 미사흔의 왜국생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내물왕 아들로 복수극에 희생되어 실성왕 때 왜국에 인질로 간 미사흔은 아마 10년? 정도 왜국에서 있다가 박제상의 주선으로 귀국한다. 《사기》와 《유사》에는 왜국에서의 미사흔 삶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구출 과정을 보면 엄격한 감시에 시달리며 실상 죄수와 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묘사 혹은 암시된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무리 인질이라 해도 10년을 저리 쳐박아둘 수는 없다. 그리고 볼모랑 죄수는 다르다. 그렇다면 미사흔의 실제 왜국생활은 어땠을까? 이건 개돼지도 상상 가능하다. 미사흔에게 여자는 없었을까? 십년 동안 홀아비였을까? 열라 주지육림에 놀았으리라. 어울리는 여자들은 급이 달랐다. 개중엔 왜왕의 딸도 있었으니 아도 배게 했다. 미사흔이 도망가자.. 2019. 10. 17. 신라 기마행렬을 토해낸 경주 쪽샘 사냥·무용 모습 그린 1천500년전 신라 행렬도 나왔다송고시간 | 2019-10-16 09:00경주 쪽샘 44호분 토기서 발견…대형항아리 등 유물 110여점 출토"인물·복식 묘사 구체적…고구려와 교류 보여주는 자료" 가설 덧집까지 씌워놓은 경주 쪽샘지구 44호분 발굴이 더디기만 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컸는데, 그런 중에서도 발굴이 계속된 모양이라, 이번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온 듯하다. 비록 토기에 새긴 그림이기는 하나, 지금껏 신라문화권에서는 보기 힘든 사냥과 무용 장면을 묘사한 소재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런 그림만 보이면, 고구려 영향 운운하기도 하고, 실제 조사단에서도 그런 영향관계를 짚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듯하지만, 저런 그림은 실은 고구려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요, 동아시아 보편의 소재.. 2019. 10. 16. 100년전 함경도 여관이 고용한 조선여인들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잔더(Hermann Gustav Theodor Sander.1868-1945)가 함경북도 성진과 길주 지역 조사를 위해 1906년 9월 16일에서 24일까지 묵은 '도쿄관'이란 여관에서 일하던 조선여인들이다. 도쿄관이 성진과 길주 중 어느 곳에 있던 여관인지는 내가 확실한 자료가 없다. 아래 기사에서 언급한 자료들을 보면 답을 찾을 것이다. 잔더가 고용한 일본인 사진가 나카노가 촬영한 것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됐다. Korean women employed in a hotel or inn in 1906 The photo was taken in September 1907 by Nakano, a Japanese photographer employed.. 2019. 10. 16. 무악재를 오르는 사람들 서울에서 은평 쪽으로 가는 여정 첫 고개인 무악재를 사람들이 오른다. 사진을 촬영한 지점이 무악재 정상임은 분명한데, 저 방향이 서울 쪽인지, 반대편인지는 확실치 않다. 은평 쪽 방향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이 모습이 조선 전기 이래 전통적인 이동 방식이었다. 산림은 이미 17세기 중반 이래 거덜난 그 모습이라, 온 산에 멀쩡한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온 국토가 사막이라,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 보는 풍광이랑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비가 오면 다 녹아 내렸으며, 길바닥은 진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산림녹화사업과 아스팔트 건설, 그리고 아파트 문화가 왜 혁명인지는 실감한다. 우리는 과거를 너무 쉽게 망각한다. 1907년 9월,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잔.. 2019. 10. 15. 이전 1 ··· 354 355 356 357 358 359 360 ··· 402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