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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716

[비형랑과 화랑세기] (2) 형을 도운 낭정郞政 "비형랑은 형을 도와 낭도郞徒를 다스렸다" 이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에 사륜계를 선전·홍보하는 목적이 담긴 이유로 많은 신라사학도가 보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실질 주인공이라 할 비형랑鼻荊郞을 용춘龍春으로 보기 때문이다. 용춘이 누구인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아버지 아닌가? 이런 견해에 의한다면 비형랑은 바로 김춘추의 아버지다.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비형랑과 그가 거느린 귀신 무리의 행태가 화랑이라고 본다. 어째서 그러한가? 다음 신종원의 언급은 그 이유를 집약한다. “비형이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나라의 큰 공사를 지휘하였다는데 이것은 전쟁시 무장武將으로 나아간 것과 같다. 비형은 ‘郞’이라 불리었으며, 휘하의 유능한 인물을 천거하는 등의 면모에서 비형 자신과 그 무리를.. 2024. 2. 21.
AI로 되살린 기생들(2) 방식은 앞과 같다. 다만 이들 사진 혹은 엽서에 대한 진위 판별은 내 작업 범위를 벗어난다. 웹에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골랐다. *** previous article *** AI로 증폭해 본 근대 기생님들 AI로 증폭해 본 근대 기생님들 인터넷에 기생 사진이라 해서 떠돌아다니는 님들을 긁어서 AI로 증폭해 봤다. 유료로 돌리면 더 좋은 화질을 얻겠지만 이것으로 그런대로 만족한다. 물론 저들 사진 출처는 식민지시대에 발행된 historylibrary.net 2024. 2. 20.
[비형랑과 화랑세기] (1)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가 사륜계 홍보용? 화랑세기를 기존 역사학계가 왜 조작된 위서로 몰아야 하는지를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로써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물에서는 인류학 혹은 그런 관점이라 부를 만한 분석도 아울러 시도할 것이다. 자연히 드러나겠지만, 현존 《화랑세기》에서 드러나는 인류학적 개념들은 20세기를 살다간 남당 박창화는 결코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이다. 언감생심 어디에서 흉내를 낸다는 말인가? 허무맹랑한 소리 좀 그만 좀 하고 허심하게 화랑세기를 분석 대상으로 보았으면 한다. 지금 내 책상머리엔 신라사학회 기관지인 《신라사학보》 중 2008년 12월로 발간 일자가 찍힌 제14호가 있다. 그 첫머리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고대사상사 전공 신종원이 투고한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에 보이는 ‘鬼神귀신’ 세력’이라는 .. 2024. 2. 20.
AI로 증폭해 본 근대 기생님들 인터넷에 기생 사진이라 해서 떠돌아다니는 님들을 긁어서 AI로 증폭해 봤다. 유료로 돌리면 더 좋은 화질을 얻겠지만 이것으로 그런대로 만족한다. 물론 저들 사진 출처는 식민지시대에 발행된 엽서가 압도적이다. 다만 그 엽서들조차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빛이 바랬다. AI 기술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일부는 증폭한 다음 포토샵 기능을 활용해 보정했다. 그런대로 인쇄용 사용 정도는 가능하도록 해 봤으니, 이용하고픈 분들은 맘껏 활용하기 바란다. 정윤희를 빼다박은 기생도 있다. 2024. 2. 20.
한번 보고 두번 보고 못잊어 다시 찾은 기생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제5권에 보이는 대중례待重來라는 기생 이야기다. 김 사문金斯文(사문斯文은 유학자를 지칭하는 말-인용자)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극력極力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하인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 것이 아닌가 하여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에 실망하고는 밀양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는,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2024. 2. 20.
[귀주대첩] (3) 거란을 엿 먹이는 고려, 북송 연호를 채택하다 거란과 모든 관계를 닫아버린 고려는 현종 7년, 1016년 연호마저 개태開泰라는 거란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선 북송北宋 연호인 대중상부大中祥符를 채택해 쓰기 시작한다. 한데 이 일이 이상한 점은 앞서 보았듯이 거란을 버리고 이제 다시 宋을 섬기겠다는 고려의 요청을 宋이 거부했다는 데 있다. 이미 그 자신도 거란에 신속해 버린 송은 거란 눈치를 봐서 고려를 외방外邦 제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완곡히, 그러면서도 분명히 했다. 다만 그렇다 해서 송으로서도 그러지 말라 말릴 처지도 아니었다. 지들이 좋아서 지들 맘대로 한다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음 그만이었다. 나는 고려가 실제로 宋으로부터 무슨 실질적인 지원, 예컨대 군사지원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고려가 등신이 아닌 이상 당시 거란..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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