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820

무령왕 부부는 왜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잘까? 막상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간단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싸운 분투는 이가 갈린다. 이를 보며 왜 무령왕릉 부부는 머리를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두었을까를 끊임없이 물었다. 저네가 바보가 아닐진대 왜 저랬을까? 20년을 투자한 의문은 최종본 교정 중에 실로 어이없게 풀렸다. 인쇄 들어가기 직전..그 대목을 기어이 쑤셔박았다. 난중에 별도 논문으로 발표할까도 생각지 아니한 건 아니나 거꾸로 가든지 아니면 이에서 허비하고 말자고 생각했다. (2016. 5. 29) 2021. 5. 29.
[천안 천흥사論] (3) 왕건이 성거산 오색구름을 본 수헐원愁歇院 우리는 앞서 고려 태조 왕건이 지금의 위례산을 바라보고는 신이神異한 오색 구름이 위에 이는 모습을 보고는 신성한 기운이 노니는 곳이라 해서 그 산을 성거산聖居山이라고 부르게 했다는 기록을 접했거니와 그 오색 구름을 본 장소를 신증新增에서 이르기를 직산현 서쪽 수헐원愁歇院이라 했다는 대목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곳에서 그가 동망 산상東望山上, 곧 동쪽으로 산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했으니, 곧 죽어도 수헐원이라는 데는 이 성거산(위례산)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어야 하며, 아울러 이곳에서 위례산이 보여야 한다. 이에 수월헌이 분포할 만한 대략의 범위를 지도에서 그리면 아래와 같다. 위례산, 곧 성거산을 기준으로 수헐원이라고 동글배기 친 어드메쯤에 수헐원이 있었을 것이다. 더 범위를 좁힌다면 수월원은 원院이라는.. 2021. 5. 19.
[천안 천흥사論] (2) 고려~조선 성거산은 지금의 위례산 직산 성거산 아래 천흥사 존재를 증언하는 문헌으로는 언제나 신증동국승람을 인용하거니와, 그 권 제16 충청도忠淸道 직산현稷山縣을 기술하면서 그 산천山川과 관련해, 이를 둘러싼 산으로는 현縣 서쪽 3리 지점에 있으면서 이 고을 진산鎭山인 사산蛇山을 필두로 성거산聖居山, 양전산良田山, 망해산望海山을 들거니와 양전산良田山은 글자 그대로는 토질이 좋은 산이라는 뜻이며, 망해산望海山은 바다를 조망하는 산이라는 뜻이어니와, 이곳에서 바다를 볼 수 없거니와 그만큼 사방을 조망하기 좋다는 뜻에서 딴 것이 아닐까 한다. 저들 중에서도 성거산聖居山을 일러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在縣東二十一里。高麗太祖嘗駐蹕于縣西愁歇院,東望山上有五色雲,以爲有神祭之,遂稱聖居山。我太祖、世宗幸溫泉時,亦祭之。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2021. 5. 19.
70년대에 부활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증보판 주인공은 무령왕릉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또 지금 봐도 사상 유례없는 호화양장의 거질 조선 고고미술 씨리즈다. 총기획은 조선총독부. 소위 식민사관의 본산과도 같은 뿌리로 분류된다. 조선 식민통치의 부산물이며 그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목적은 하늘이 두쪽 나도 부인할 수 없다. 문화재관리정책 치고 그렇지 아니한게 있던가? 일제 패망과 더불어 뒤안길로 사라진 이 고적도보가 느닷없이 1970년대에 부활한다. 똑같은 표지에 똑같은 양장으로 증보판을 낸 것이다. 총감독은 아리미쓰 교이치..유광교일有光敎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고적조사에 다년간 종사한 자로써 103세인가를 살고는 몇년 전 사망했다. 이 증보판 필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70년대에 부활한 조선고적도보 증보판 필자가 누군 줄 아는가? 이 증보판에.. 2021. 5. 19.
[천안 천흥사論] (1) 만남의광장 봉선홍경사와 톨게이트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191번지 일원에 소재하는 천흥사지天興寺址라는 절터가 외부로 알려진 동기를 보면 첫째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두 문화유산, 곧 천흥사지 오층석탑과 천흥사지 당간지주, 둘째 제자리를 떠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천흥사지 동종 크게 두 종류로 말미암는다. 전자 석탑과 당간지주는 이곳에 절터가 있었음을 웅변하며, 아울러 그 분포양상을 대략 짐작케 하는 반면, 후자는 천흥사라는 절과 그 동종을 만든 내력을 짐작케 하거나 알려준다. 전자는 꼭 석탑과 당간지주가 아니래 해도, 이번 발굴조사 이전까지 과수원으로 변한 주변으로 이 일대 어느 시기에 절과 같은 대규모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각종 흔적이 농후하게 발견됐다. 여타 옛날 절이 그렇듯이 천흥사 역시 그 정확한 .. 2021. 5. 18.
산성이 무에 소용인가? 북한산서 소환한 임경업과 윤선도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산성 무용론이 봇물터지듯 한다. 산성을 놔두고 적들이 횡하니 지나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백마산성 임경업이 그 결정적 단초였다. 호언장담.. 하지만 철기군은 잘 있으레이 한마디 남기곤 한양으로 휑하니 날았다. 멍 때린 임경업이 할 일은 암것도 없었다. 산성이 효용성을 지닐 때는 첫째, 적이 쌈을 걸어와야 하고 둘째 걸어오지 않고 지나 쳐도 산성에서 기어나와 끊임없이 적 배후를 교란할 때다. 하지만 조선군은 산성에만 기어박혀 암짓도 하지 않았다. 산성이 효용성을 지닌 유일한 곳이 고갯길. 이곳은 적들 역시 지나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산성 무용론엔 정치투쟁도 점철한다. 윤선도는 대표적 산성 무용론자였다. 산성이 완전 폐기되기는 조선말 대한제국이었다. 실제 페기된 것이며 아무짝에도.. 2021. 5. 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