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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504

위대한 18-19 세기 필자가 생각건데 17세기까지 강고하게 이어온 노비 사역의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특정시대에 갑자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우리 역사에서 일부 지배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은이러한 노비에 방불한 신분 억압의 상태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18-19세기의 노비해방과 신분 상승운동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다. 이 시기에 비로소 수천 년을 이어온 신분제 질서가 동요하게 되고 그 틈을 타고 불과 백년 전만 해도 노비가 절대다수였던 향촌에 너도나도 양반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불과 백년만에! 놀랍지 않은가? 실제로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20세기 우리가 목격한 한국사회의 변화보다더 격렬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2025. 7. 8.
삼정의 문란? 혁명의 시작! 우리는 19세기 민란의 시대 개막을 이야기할 때 삼정의 문란이라는 이야기를 그 원인으로 드는데 생각해 보자. 삼정이 문란해지지 않으면 구체제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이야긴데 그건 뭐 그대로 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삼정의 문란이 반드시 나쁜 쪽으로 작용한 것만은 아니다. 군역의 기초가 되는 호적이 개판이 되니 동네마다 남정네는 죄다 유학을 칭하고 양반 행세를 했지 만약 이전처럼 빡세게 호적 관리를 했어보자. 신분제 동요는 꿈도 못꾸고우리나라는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그때까지도 노비사역이 동네마다 있었을 수도 있다. 삼정의 문란 결과물 중 가장 큰 것이바로 동네마다 양반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인데 삼정의 문란이 한국사에 있어 반드시 나쁜 쪽으로만 작용했겠는가. 그것이 아닌 다음에야 삼정의 문란이란 애초에 .. 2025. 7. 7.
양반들 문집의 말을 믿지 말라 양반들 문집에 묘사된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의 정경과 실제 모습은 엄청난 괴리가 있다. 따라서 양반들이 쓴 글, 폼나는 글, 이걸 믿으면 역사학이고 나발이고 없다. 조선시대 기록에서 항상 의심해야 하는 것은 양반들 글이다. 양반들 글을 보면, 조선은 잘못한 게 없다. 그런데 그런 글들이 묘사한 조선의 모습과는 상반되게17세기부터 나라가 망하는 20세기 초엽까지 조선의 향촌은 들끓고 있었다. 한 세대가 넘어가면 노비에서 신분이 유학으로 바뀌고 이들이 19세기가 되면 궐기하여 관가를 때려부쉈다. 일본이 아니라도 서구 제국주의가 아니라도 당장 오늘 내일 하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양반들 문집의 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승정원일기도 믿지 말라. 이런 기록들 보다는 차라리 그 당시 남아 있는 호적 한 장이 더 .. 2025. 7. 7.
19세기의 창씨개명 재미있는 것은 19세기 초반부터 우리나라 호적을 보면 노비가 눈에 띄게 줄어 들어 한 눈에도 노비 사역이 생산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과 함께가구의 크기가 줄어들고 집집마다 죄다 성을 가지게 되고 이들이 "유학"을 칭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소위 19세기 들어 양반 숫자가 급증한다는 설의 근거가 이것이다. "유학"을 칭한다고 죄다 양반이냐 하는 반론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그 전 시대에 "유학"은 아무나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의미있는 변화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말이다. 19세기에는 이렇게 독립가구의 숫자가 늘면서 "창씨개명"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확연히 느낀다. 유학을 칭하자니 그럴 듯한 성이 있어야 하고 양반 성인데 개똥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2025. 7. 7.
19세기에 왜 민란이 폭증하나 향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18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호적만 해도 엄청난 변화가 있다. 아직까지도 노비 사역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집집마다 4-5명의 노비를 데리고 있던 것이 18세기 전반. 많게는 20명씩 노비를 거느린 집도 드물기만 하지만 보이는 시대다.18세기 후반이 되면 노비는 한 집에 1-2명 정도로 축소되고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딸과 노비 한두 명으로 이루어진 집이 보편화 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이 필자가 볼 때 지주 전호제가 보편화하는 시기다. 소작농이 보편화하는 시기다. 18세기 전반만 해도 노비 사역이 주류라 소작농이 보편화 할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소작농이 향촌에서 보편화하는 시기는 영정조 연간이다. 그 이전에는 노비사역이다. 서양사로 본다면 노예제와 .. 2025. 7. 7.
조선왕조실록의 공노비 해방 교서 순조실록2권, 순조 1년 1월 28일 을사 3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내노비와 시노비의 혁파에 관한 윤음을 내리다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중용(中庸)》을 읽고 있는데,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구경(九經)이 있으니, 그 여섯 번째에 이르기를, ‘서민을 자식처럼 돌보아야 한다.’ 하였다. 주 부자(朱夫子)는 이를 해석하기를, ‘백성을 내 아들과 같이 사랑하여 보살핀다는 것이니, 내가 일찍이 책을 덮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들이 그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슬프고 괴로운 일이라도 반드시 나아가야 하고, 어버이가 그 아들은 양육함에 있어서 질병에 걸리면 반드시 구원해야 하니, 임금과 백성 사이에 있어서도 간곡히 돌보아 주고 기향(蘄向)하는 것이 또.. 202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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