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722

왜 양반 수는 불어만 가는가 조선후기 양반 수가 불어가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우리는 기존의 양반들 후손들이 예를 들어 벼슬길이 오래 끊기거나 아니면 서자 집안이라 제대로 된 양반에 결격사유가 생기면 순순히 우리는 양반 아니오 하고 내려갔을 것 같지만천만의 말씀이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한번 양반 후손들은 순순히 양반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특히 호적에 유학, 그게 아니면 양반의 끝자리인 업유, 업무라고 적는데 민감하여결사적으로 이에 달라 붙어 쉽게 내놓지 않는다. 어쩌다 호적을 좀 빡빡하게들 조사했는지원래 유학이었다가 업유나 업무, 재수 없으면 선무군관으로 밀렸다고 치자. 다음번 호적 때는 반드시 유학으로 원상 복귀를 시도한다. 당대에 안되면 아들이라도 아버지 직역을 학생으로 반드시 고쳐 놓는다. 그도 그럴것이 호적에 유학으로 .. 2025. 9. 1.
뒤 늦게 불 붙은 장작 우리나라 호적은 시계열 자료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전국에 몇 군데 안된다. 이 몇 군데 안되는 자료로 조선후기의 계급의 변동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이 나온다. 하지만 이 지역들이 조선 전체를 반영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농업발전에 있어서 현재 호적이 남아 있는 곳이 낙후되었던 지역이 아니라 이앙법이 도입되는 단계부터 수리시설의 증대까지 당시 전국을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역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앙법 도입만 해도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빨랐다. 이 17세기 부터 19세기까지 시계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뒤늦게 불붙은 장작이다. 일본과 비교한다면 옆나라는 17.. 2025. 9. 1.
1690년. 양반인구 7.4 퍼센트 우리나라 조선시대1690년에 양반 인구는 전체 인구의 7.4 퍼센트 였다. 이 당시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후손을 남겼다면지금 우리들 중 1690년에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은 10명에 1명도 안되는 셈이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1790년 경에도 전체 인구 중 양반 인구는 30프로가 안 되었다. 우리 중 1790년에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은 10명 중 3명도 안 되는 셈이다. 노비인구를 보자면, 1678년에는 62%, 18세기 전반에는 40∼50% 사이, 18세기 중엽에는 30∼40% 사이로 18세기 중엽까지도 전체 인구의 1/3이 아직 노비였다. 이 문제를 우리 학자나 역사의 독자들이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지만 한국의 근대사는 제대로 볼 수 있다. 집집마다 전부 양반 조상이고, 19세기의 양반모칭자.. 2025. 9. 1.
밧줄로 목 감기고 손 뒤로 묶인 2,300년 전 페루 인신공희 유골 발굴 페루의 한 고대 사원을 발굴하던 중 고고학자들은 2,300년 된 12개체 이상의 유골을 발견했는데, 그중 일부는 인신공희 증거를 보였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골에서 몇 가지 희귀한 특징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무덤에 안치된 방식이 이상하다"라고 이번 연구를 이끄는 산마르코스 국립대학교 고고학 교수 헨리 탄탈레안Henry Tantaleán은 말했다. 유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는데, 이는 안데스 선사 시대 전체에서 흔치 않은 매장 방식"이었다. 탄탈레안은 몇몇 사람이 두개골 골절이 있고, 일부는 목에 밧줄이 감겼으며 손이 등 뒤로 묶인 상태였다고 말했다.그는 이로 볼 때 이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며, "제물이나 부장품이 함께 제공되지 않은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탄탈레안 박사에 .. 2025. 9. 1.
과거가 없어져 분통이 터진 이승만 부친 우남 이승만의 회고를 보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가 캔슬되어이제는 과거시험 더이상 없다고 했을 때, 이 대통령 부친도 평생을 과거 시험 보러 다녔던 모양으로 땅을 치며 통분해 마지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자신의 영달 마지막 수단으로 과거를 노렸던 것인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너무나 분통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 집안은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이지만이미 오래전에 벼슬이 끊겨 영달하지 못한 집안으로 알아서 아마도 이대통령의 부친이 과거시험 볼 때도 준호구를 떼서 들고가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유학, 친가 3대 외조 학생처가 3대 외조 학생이리 적혀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참고로 [일성록]에서고종 28년(1891)의 과거시험 기록을 확인해 보니10만 명 이상이 응시한 시험을 이 해에만 26회 실시했다고 한다.그.. 2025. 8. 31.
될 리가 없었던 조선시대 오가작통법 한국사를 배운 사람들은 누구나 오가작통법을 다 알 것이다. 교과서적인 설명은 이렇다.오가작통법은 5호(戶)를 1통(統)으로, 5통을 1리(里)로, 약간의 리를 하나의 면(面)으로 형성하여 면에 권농관(勸農官), 한성부에는 관령(管領)을 두어 호구의 동태를 보고하게 한 제도이다. 이건 교과서적 설명이 이렇다는 소리이고, 실제는 그러면 어땠느냐,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필자도 모르지만대략 짐작할 만한 것은 있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이 오가작통법에서 5호씩 묶어 1개의 통을 구성한 내역이 적혀 있다. 예를 들어 5개 호를 연달아 쓰고 나서 그 5개 호는 하나의 통으로 여기에 통수를 지정해 놓는 것이다. 오가작통법이라는 게 말로만 되어 있는 도상 구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딱 봐도 .. 2025. 8. 31.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