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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의 회고를 보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가 캔슬되어
이제는 과거시험 더이상 없다고 했을 때,
이 대통령 부친도 평생을 과거 시험 보러 다녔던 모양으로
땅을 치며 통분해 마지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자신의 영달 마지막 수단으로 과거를 노렸던 것인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너무나 분통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 집안은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이지만
이미 오래전에 벼슬이 끊겨 영달하지 못한 집안으로 알아서
아마도 이대통령의 부친이 과거시험 볼 때도
준호구를 떼서 들고가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유학, 친가 3대 외조 학생
처가 3대 외조 학생
이리 적혀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참고로 [일성록]에서
고종 28년(1891)의 과거시험 기록을 확인해 보니
10만 명 이상이 응시한 시험을 이 해에만 26회 실시했다고 한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아마 저러한 8 분의 조상이 몽땅 학생인 준호구를 들고 과거를 보러갔을 텐데,
이들 모두 준호구에는 "유학"이라 다들 적혀 있었을 테니
나도 "양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과거가 끝나도 내가 양반이란 증명서 겸해서
그 준호구, 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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