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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으로서의 학예직, 그 이상야릇한 처지를 보며] (2) 문화재를 한다는 것 그 자신 처지를 반영한 것이는 하겠지만, 꼭 공무원으로 국한할 문제도 아니요 민간영역에도 나는 다 해당한다고 보는데 무엇이 학예직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오랜 기간 원주시에서 학예직으로 근무하다 얼마 전 퇴직한 박종수 선생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고 본다. 그가 말하기를 지자체에서 학예직은 그 지방 문화재청장이라 했다. 물론 이는 그 시절 지자체에 학예직 꼴랑 한 명 있을 시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 아니했다는 점에서, 또 지자체 영역을 벗어나 민간영역으로 간다 해서 인력이 더 넘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나는 언제나 저 말이 맴돌거니와, 저 말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보거니와, 나는 저 말을 문화재학으로 이해한다. 언제 문화재청장이 한가롭게 전공 따져서.. 2023. 12. 19.
신라와 백제의 수레 바퀴 흔적 고조선의 수레가 말이 끌었는가 소가 끌었는가는 솔직히 필자로서는 백프로 확신은 못하겠다. 고조선 유물을 보니 세형동검과 수레 부속이 나오는 무덤에서 말 재갈이 함께 나온 경우가 있어서다. 단 이것이 그 수레를 말이 끌었다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고구려의 예를 보면 서기 4세기 이후에는 귀인들의 수레는 소가 끌었던 것은 확실해 보이고, 이 시점이 되면 말과 소는 확실한 업무분담이 시작된것 아닌가 싶다. 말은 기승용으로 소는 귀인의 자가용끌기로. 아마도 김단장께서 올린 글처럼 북위에서 고구려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이 말-소의 전파과 함께 일본에도 전해져 그 모양 그대로 헤이안시대에도 이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가끔 보고되는 백제와 신라 왕성이나 성에서 확인했다는 수.. 2023. 12. 19.
[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4) 자격루 제작과 출세길 4. 자격루 제작과 출세 세종은 재위 15년(1433) 자격루를 제작한다. 그 아이디어는 놀랍게도 세종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격루란 물시계 일종이다. 그 원리는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하지만 세종이 제아무리 명민한 군주라 해도 그는 설계자였지 제작자일 수는 없다. 그 아이디어와 설계도를 실제로 구현할 인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을 장영실이 맡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하니 당연히 포상이 따라야 한다. 이해 9월 16일자 다음 기록은 그 포상을 정리한 것이다. (임금이)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 2023. 12. 19.
[화랑세기 트라우마] (1) 용수-용춘의 문제 화랑세기 출현 이후 한국고대사학계, 특히 신라사학계에는 ‘화랑세기 트라우마’에 견줄 수 있는 현상이 있다고 했거니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용수龍樹-용춘龍春 문제다. 두 이름은 김춘추 계보를 논하면서 그 아버지로 등장하는 표기로, 화랑세기 출현 이전에는 이 두 표기를 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뜻밖에도 이 둘이 다른 사람으로 드러났다. 한데 이에 놀란 사람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 두 표기가 등장하는 맥락을 다시 살피니, 정말로 딴 사람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이렇게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집필진이 용수-용춘을 딴 사람으로 인식했느냐 하는 논란이 있다. 나는 적어도 삼국사기는 그랬다고 본다. 하지만 집필진이 그렇게 인식했건 아니했건, 이건 중요하지않다... 2023. 12. 19.
말과 소가 세트를 이룬 북위시대 귀인 행차 신동훈 교수 관련 글들, 그리고 그에 대한 바로 앞 코리끼표 명나라 만력제 행차와 연속하는 관점에서 북위시대 귀인 행차를 새삼 소개한다. 북위는 널리 알려졌듯이 북방 선비족이 이룩한 왕조로, 지금의 중국 동북방에서 밀고 내려와 세력을 확장하다 지금의 산서성 북쪽 대동大同에서 통일 왕조를 이룩하고는 이내 우리도 변방에서는 살 수는 없다 해서 낙양으로 천도하고는 중국 북방을 통일한다. 선비족은 본래 유목 부족이다. 그래서 말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 그들도 느긋한 행차에 쓰는 수레는 소를 썼다. 말은? 전쟁통에는 당연히 전투에 말을 썼다. 이 전쟁통도 우마 쓰임새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이 있는데, 군량미나 무거운 무기는 모조리 소가 옮겼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전쟁통에도 말과 소는 언제나 세트로 움직였다... 2023. 12. 19.
소가 끌다 코끼리로 교체된 명나라 황제의 수레 요새 신동훈 교수께서 맹렬히 우리가 흔히 마차馬車로 아는 것이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니라 실은 소가 끄는 우차牛車일 가능성을 지적하는 글을 연속으로 쓰고 계신 바 간단히 그 맥락을 추리자면, 귀인貴人으로 분류할 만한 돈께나 있는 사람들은 나들이에 말을 이용하지 않았고 소를 이용했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 말을 타지 않았는가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군인들은 당연히 말을 탔다. 소 타고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날렵함을 무장해야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말이 도입되고서는 탔다. 하지만 그런 시급성을 다투지 아니하는 사람들한테, 또 말 타기에는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는 사람들한테 말은 굉장히 위험한 교통수단이었으니, 낙마사고로 죽는 일이 그리 많았으니, 이는 요새 교통사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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