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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탈회위크에서 20명 주검 묻은 영혼의 집 발견 튀르키예 중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석기 시대 유적 중 하나인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에서 고고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을 했다.폴란드 포즈난Poznań 대학교 선사시대 연구소 아르카디우스 마르치니악Arkadiusz Marciniak 교수가 이끄는 유적지 동쪽 구역 발굴에서 안뜰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밀집된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중 다수는 주거 용도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르치니악 교수에 따르면,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죽음의 집House of the Dead" 또는 "영혼의 집Spiritual House"으로 불리는 구조물로, 20명 유해가 의도적으로 바닥 아래에 묻혀 있었다.연구자들은 이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사망하여 의식적 매장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하며, 이 건물은 .. 2025. 9. 1.
호적만으로 더 이상 지배자가 구분 안되는 시기-19세기 18세기 이전에는호적만으로도 양반 구분이 쉽다. 우선 양반의 직역인 유학, 그보다 하나 아래이지만 어쨋건 양반 취급 받아 군역 면제인 업유,업무, 교생 등 이런 직역을 받아 호적에 적힌 사람도 많지 않은 데다가, 이런 양반들은 모두 많게는 20-30명에서 적어도 5-6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딱봐도 양반인걸 안다. 그런데 19세기 들어오면지금 우리네 주민등록 등본처럼 호적만 봐서는 이 사람이 도대체 양반인지 평민인지, 아니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분간이 쉽지 않다. 모두 비슷한 크기의 가구로 나뉘어 호주가 되어 있고, 이들 사이에는 아마도 지주-전호제로 소작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텐데그러한 관계가 적어도 호적에서는 파악이 안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18세기 이전도 노비를 20-30명 거느리고 .. 2025. 9. 1.
왜 양반 수는 불어만 가는가 조선후기 양반 수가 불어가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우리는 기존의 양반들 후손들이 예를 들어 벼슬길이 오래 끊기거나 아니면 서자 집안이라 제대로 된 양반에 결격사유가 생기면 순순히 우리는 양반 아니오 하고 내려갔을 것 같지만천만의 말씀이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한번 양반 후손들은 순순히 양반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특히 호적에 유학, 그게 아니면 양반의 끝자리인 업유, 업무라고 적는데 민감하여결사적으로 이에 달라 붙어 쉽게 내놓지 않는다. 어쩌다 호적을 좀 빡빡하게들 조사했는지원래 유학이었다가 업유나 업무, 재수 없으면 선무군관으로 밀렸다고 치자. 다음번 호적 때는 반드시 유학으로 원상 복귀를 시도한다. 당대에 안되면 아들이라도 아버지 직역을 학생으로 반드시 고쳐 놓는다. 그도 그럴것이 호적에 유학으로 .. 2025. 9. 1.
뒤 늦게 불 붙은 장작 우리나라 호적은 시계열 자료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전국에 몇 군데 안된다. 이 몇 군데 안되는 자료로 조선후기의 계급의 변동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이 나온다. 하지만 이 지역들이 조선 전체를 반영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농업발전에 있어서 현재 호적이 남아 있는 곳이 낙후되었던 지역이 아니라 이앙법이 도입되는 단계부터 수리시설의 증대까지 당시 전국을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역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앙법 도입만 해도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빨랐다. 이 17세기 부터 19세기까지 시계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뒤늦게 불붙은 장작이다. 일본과 비교한다면 옆나라는 17.. 2025. 9. 1.
1690년. 양반인구 7.4 퍼센트 우리나라 조선시대1690년에 양반 인구는 전체 인구의 7.4 퍼센트 였다. 이 당시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후손을 남겼다면지금 우리들 중 1690년에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은 10명에 1명도 안되는 셈이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1790년 경에도 전체 인구 중 양반 인구는 30프로가 안 되었다. 우리 중 1790년에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은 10명 중 3명도 안 되는 셈이다. 노비인구를 보자면, 1678년에는 62%, 18세기 전반에는 40∼50% 사이, 18세기 중엽에는 30∼40% 사이로 18세기 중엽까지도 전체 인구의 1/3이 아직 노비였다. 이 문제를 우리 학자나 역사의 독자들이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지만 한국의 근대사는 제대로 볼 수 있다. 집집마다 전부 양반 조상이고, 19세기의 양반모칭자.. 2025. 9. 1.
밧줄로 목 감기고 손 뒤로 묶인 2,300년 전 페루 인신공희 유골 발굴 페루의 한 고대 사원을 발굴하던 중 고고학자들은 2,300년 된 12개체 이상의 유골을 발견했는데, 그중 일부는 인신공희 증거를 보였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골에서 몇 가지 희귀한 특징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무덤에 안치된 방식이 이상하다"라고 이번 연구를 이끄는 산마르코스 국립대학교 고고학 교수 헨리 탄탈레안Henry Tantaleán은 말했다. 유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는데, 이는 안데스 선사 시대 전체에서 흔치 않은 매장 방식"이었다. 탄탈레안은 몇몇 사람이 두개골 골절이 있고, 일부는 목에 밧줄이 감겼으며 손이 등 뒤로 묶인 상태였다고 말했다.그는 이로 볼 때 이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며, "제물이나 부장품이 함께 제공되지 않은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탄탈레안 박사에 .. 202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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