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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이 관리권을 이양한 소수서원, 행안부가 허가한 인삼박물관 전국 박물관 연혁과 현황 정리 차원에서 앞서 경북 영주시 소속 소수박물관과 인삼박물관 두 곳을 정리했거니와 거기에서 아주 요상한 대목들이 발견되어, 영주시 쪽에 공식 취재에 들어가 아래와 같은 사항들을 오늘 확인했으니 1.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이 소수서원이 있기에 소수박물관 성립이 가능함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문제는 소수박물관과 소수서원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있다. 이를 위해 소수서원 운영 양태, 특히 그 법적인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2023년 8월 현재, 소수서원은 법인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세무서에 단체등록을 하고 고유번호만 받아 활동한다. 이로써 보면 법적인 기반이 굉장히 허약한 셈인데, 그런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곡절이 있었는지.. 2023. 8. 9.
실력없는 사람이 변려문 읽는 법 필자처럼 실력이 없는 사람은 변려문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 오히려 조선시대에는 변려문이 특수한 경우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고 고문이 장려되었기 때문에 별문제 없는데, 통일신라-고려시대 글에는 변려문이 꽤 많은 것으로 안다. 이런 글은 상당히 읽기가 난삽해서, 고려시대 글이 조선시대보다 읽기가 쉽지 않다. 필자의 경우 그렇다는 소리다. 필자가 어거지로라도 변려문 읽는 방법을 써 보면, 변려문이 해석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4자, 6자로 댓구를 극악하게 맞추려 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글자를 넣게 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잘 안 쓰는 글자) 둘째는 각종 일화나 성어를 밑도 끝도 없이 집어 넣어 정확히 해석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이미 검증된 기관에 의해.. 2023. 8. 9.
소나무 숲 너머로 달 떠오른 월송정 by 신정일 강원도에 있는 관동팔경 중 가장 아래쪽에 있는 정자가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이다. 월송정으로 들어가는 초입은 굵은 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운치가 있는데 이 소나무 숲을 성단송전城壇松田이라 하고, 이 솔밭에 평해·장수·창원 황씨 시조가 된 황낙黃洛을 기리는 비석인 황장군단비黃將軍壇碑가 있다. 중국 당나라 고종 때 학사였다는 황낙이 굴미봉 아래에서 살았는데, 그의 묘가 이 근처에 있었으므로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추모한다. 황장군단비 앞에는 황낙을 모신 사당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소나무 숲길을 한참을 따라가면 월송정이 나온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바닷가에 위치하며 관동팔경 중 하나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누정樓亭’ 조에 실린 글은 다음과 같다. 월송정越松亭: 고을 동쪽 7 리에.. 2023. 8. 9.
죽을 만치 더운 날 찾은 티볼리 로마 황제 별장 티볼리는 로마서 동쪽으로 대략 이십키로 떨어진 산간이다. 라틴평원에선 드물게 산이 있고 로마서 가차우니 이곳에다 토목황제 아드리아누스 Hadrianus 황제는 피서지 별장을 맹글었다. 이곳 빌라 데스테 Villa d'Este와 빌라 아드리아나 Villa Adriana[영어명 하드리안 빌라 Hadrian's Villa]는 세계유산이다. [라틴어나 이태리어 어두 H는 묵음이다.] 한국 중국인 없어 좋다. 이 두 민족이 없다는 건 이 역사도시가 아직은 복닥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조만간 대전 복귀가 유력한 문화재청 강모 원장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이곳으로 오는 과정이 좀 험난했으니 이곳을 찾은 한국인이 거의 없고 구글 맵 지침대로 했다가는 x되기 때문이다. 로마 지하.. 2023. 8. 9.
불 지난 자리엔 싹이라도 나지만 불 지난 자리엔 재가 남고 물 지난 자리엔 가재라도 기어다니지 세무쟁이 지난 자리엔 풀도 안 자란다. 세금 고만 미기라. (2020. 8. 9) *** 인간은 사슬에 묶인 채로 태어났다. 세금이란 사슬에. 세금 피했다 했더니 이번엔 차꼬를 채운다. 벌금 혹은 과태료라는 사슬을. 2023. 8. 9.
동문선: 최치원 발해 인식의 양면성 흔히 최치원은 발해를 속말말갈의 후신으로 생각하여 고구려와는 별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謝不許北國居上表의 다음 구절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 句驪未滅之時, 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 寔繁有徒, 是名栗末小蕃. 甞逐句驪, 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 至武后臨朝之際, 自營州作孼而逃, 輒據荒丘, 始稱振國. 위 구절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치원은 신당서, 구당서 중 신당서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최치원이 발해를 마냥 고구려와는 다른 말갈로만 보고 있었는가 따져 보면 동문선에는 이와 다른 취지의 최치원 글도 보인다. 동문선 47권: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昔貞觀中。太宗文皇帝手詔示天下曰。今欲巡幸幽薊。問罪遼碣。盖爲勾麗獷俗。干紀亂常。遂振天誅。肅淸海徼。武功旣建。文德聿修。因許遠人。亦隨..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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