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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환경과 일신의 변화 *** 아래는 April 26, 2016 글이라, 이 무렵 나는 해직 상태였으니, 더구나 《직설 무령왕릉》 출간 며칠 전이라는 그런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에서 말하는 변화가 실은 변화가 아닐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말한다. 다시 말해 원래 그러했는데 나만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2000년에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를 내고 이듬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를 냈다. 이때는 남들 보기엔 어떨지 모르나 참으로 득의한 시절이라 지금보다 더 자신만만 했고 거칠 것이 없었다. 나이는 딱 삼십대 중반이요 기자생활 8, 9년차였으니 더했을 것이다. 그때는 출판계 사정도 잘 몰라 그냥 책만 내면 되는 줄 알아 출판기념회 같은 자리도 없었다. 그때는 또 나름대로는 도덕이란 게 있어 더.. 2023. 4. 26.
간재 전우와 창강 김택영, 근대가 만든 '전통'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이란 인물들이 있다. 한 사람은 조선왕조 최후의 유학 종장宗匠으로, 한 사람은 한말韓末 한문학 4대가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이들은 기실 전통적 의미의 '양반'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선대에 특별히 큰 벼슬을 한 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기존의 '양반'들이 담지하고 있던 도학이니 한문학에 천착하여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루고 그것을 누구나 인정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삶이 근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가 조선의 '근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양반'들이 '양반다움'을 벗어던지고, 오히려 양반 아닌 이들이 그 양반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던...(2020. 4. 26) 2023. 4. 26.
해방이후 한국의 근대화 필자가 하나 예언을 하겠다. 앞으로 100년 정도 지나면, 50년대 이후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의 근대화보다 더 평가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약 70년에 걸쳐 경공업과 중화학공업 등 발전이 완만하게 이루어졌지만, 한국은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40년 동안 교육제도 정비, 경공업, 중화학공업, 그리고 덤으로 민주화까지 뒤죽박죽으로 전개되며 제국주의적 침략 하나 없이 막대한 외채를 도입하여 종잣돈 삼으며 이룩해냈다. 이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면 일본의 근대화와 한국의 근대화는 비슷해 보이지만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는데, 이러한 작업에 게으른 이들이 손쉽게 논문을 쓰는 방식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2023. 4. 26.
학예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 : 그때는 몰랐다! 신입생 면접을 끝내고 나온 교수님들이 늘 하셨던 말씀이 있다. “올해도 를 말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어.” (혹은 다행히 없었어.) ‘고고학을 보물찾기 같은 낭만적 학문이라 생각하다니!’라고 다소 어이없어하는 감정이 섞인 말일 것이다. 학예사에 대해 설명하면 늘 언급되는 에피소드(학예사가 무엇인가요 에피소드)같이, 고고학 수업 혹은 고고학 대중서를 여는 말 중 하나는 바로 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 신입생들이 를 봤던 세대가 아닐 테니, 교수님들의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냥 내 생각이다. (그런데 포스팅 하려 찾아보니, 올해도 인디아나 존스는 계속 된다! 대체 언제까지 나올 것인가!) 를 보고 고고학자를 꿈꾸었다는 사람들처럼, 나도 낭만에 가득 찬 이유로 박물관을 좋아했다. 원래도 역사책.. 2023. 4. 25.
부여 가림성 제8차 발굴 생생화보(2) from 노기환 2023. 4. 25.
부여 가림성 제8차 발굴 생생화보 from 노기환 이 발굴성과는 이 블로그에서 두 번 따로 정리했으므로 이번에는 어제인가 현장을 댕겨온 전북도청 노기환(현 백제왕도사업단 파견, 6월 말 공로연수 예정, 조만간 공무원 생활 쫑을 치신다는 뜻임) 선생이 촬영한 사진들로 감상하기 바란다. 사진 속 정보 심옹이 보인다. 현장 사정에 내가 어두울 수밖에 없지만, 남영동 사저에서 섣불리 예단컨대 이른바 집수지는 하나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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