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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500년 부수도 남경, 서울 종로에서 처음 드러난 고려 흔적 서울 종로 공사장서 고려시대 추정 유적 발견…"공적 건물인 듯" 깨진 기와에 '승안 3년' 글자 새겨져…"서울서 이 정도 규모 발견은 처음" 문화재청, 지난주 전문가 검토 회의…인근 공사장서도 유적 확인돼 주목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서울의 한 건물 신축공사 현장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되는 건물터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확인됐다. 건물의 기초가 되는 축대, 기단(基壇·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 등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과거 어떤 용도로 쓰였을지 관심이 쏠린다. 서울 종로 공사장서 고려시대 추정 유적 발견…"공적 건물인 듯" 깨진 기와에 ′승안 3년′ 글자 새겨져…"서울서 이 정도 규모 발견은 처음"문화재청, 지난주 전문가 검토 회의.. 2023. 3. 20.
비봉에서 조망하면, 진흥왕시대 신주新州 혹은 북한산주北漢山州 주치州治는 구기동 일대! 빛 좋은 개살구..아버지는 부자지만 본인은 정작 청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장성 독거가 천지 사방 서울을 휘젖는 중이라, 그 일환으로 북한산 기슭을 휘젖는 중이라 좀 전에 전화가 왔는데 윙윙 대는 배경음 딱 들으니 비봉이었다. 비봉에 서면 그 특유한 소리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비봉이라 했다. "첨 아니슈? 비봉비가 진흥왕에 의한 유교적 왕도정치 개소리라는 거 딱 느껴지지 않수?" "두 번째요" 웬일로 그짝에서 전화질인가 했더니만, 느닷없이 북한산주 주치州治 문제를 들고 나온다. 그 아래쪽에 장의사며 하는 신라시대 전설 혹은 역사가 서린 곳이 적지 아니해서 심산으로는 그 아래 구기동 일대 어딘가에 북한산주 주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미쳤다고 순수비를 비봉에다 세웠겠소? 그 아래쪽이 주치였으니깐.. 2023. 3. 20.
관관저구 군자호구 매그놀리아 서울이 북쪽이니 아무래도 남녘에 견주어 더디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양 지바른 곳에선 목련이 터지기 시작했다. 꽃은 교배다. 나 교배하고 싶단 피력이다. 봄은 시경 이래 언제나 그랬다. 물수리 꾹꾹 우는 계절은 번식이었다. 사람 역시 그러해서 그 소리 따라 관관저구 군자호구를 찾아 나물 광주리 들고 들녘으로 갔다. 2023. 3. 19.
고고학이 그려낸 발해 강역 1천100여곳 유적으로 본 발해의 영역…'발해유적총람' 발간 Heritage / 김예나 / 2023-03-14 16:56:10 정석배 교수 등, 북한·중국·러시아 지역 발해 관련 유적 총망라 https://m.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68183193390 1천100여곳 유적으로 본 발해의 영역…′발해유적총람′ 발간(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발해(698∼926)는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이어지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뤘던 고대국가다. 9세기에는 동쪽의 융성한 나라m.k-odyssey.com 교과서 같은 데를 보면 고구려 발해 강역이라 해서 현재의 지도에 얹은 그 강역도라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은 어느 특정한 시기의.. 2023. 3. 19.
오늘 글의 보유: 해방직후 서울대의 상황 필자가 쓴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해방직후 서울대는 제대로 된 대학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서울대가 경성제대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서울대에 경성제대의 교원과 연구, 교육전통이 해방이후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해방이후 경성제대는 완전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집으로 이주해 들어간 조선인 교수들은 출신 배경도 다양했다. 이들이 당시 조선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자원 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경성제대가 해방이후 문을 닫게 되었을 당시, 이 대학에는 불과 한달전에 조교수로 임명된 조선인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 서울대 교수로 들어간 분들은 출신 배경이 정말 다양해서, 의대의 경우에는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세브란스의전, .. 2023. 3. 19.
대한민국의 50-70년대 (4): 해방과 함께 텅빈 경성제대 의학부 앞에서 해방 직후 상황 두 가지를 설명하였다. 하나는 일반 국민들의 문맹률. 무려 네 명 중 세 명이 문맹 상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 좀 배웠다는 식자층은 달랐느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 반도 내에는 대학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랐고 이 때문에 30년대 부터는 아예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조선인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일본 유학생 수가 급증하는 것은 일차적인 원인은 조선 내에 쓸 만한 대학이 별로 없다는 데 있었다 할 수 있다. 경성제대는 이때 이미 있었지만, TO가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누어 뽑았고 입학생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대적 비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왜곡된 구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경성제대를 나와 봐야 어차피 ..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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