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 & THESIS

‘주라청周羅廳’ 명문기와가 증언하는 부석사 역사의 한 단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1. 27.
반응형
부석사 인근. 저 어디메쯤에 문제의 명문기와들이 발굴됐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부석사는 소백산을 조망하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거니와,

그 빼어난 경관이야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곳이라, 다만 그것이 창건하고 고려시대까지 한창 번성할 때 그 사역寺域, 곧 범위가 어느 만큼 되었는지는 확실치 아니하지만,

다만, 지금도 적지 않은 위상을 자랑하는 그것보다는 훨씬 넓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절 담장이었냐는 것. 주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거의 없어 이를 짐작할 만한 근거가 확보되지 않은 가운데 주변에서 부석사와 직접 관련하는 적지 않은 유물이 수습되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해도 좋다.

그런 판국에 부석사 부속 건물이었음이 분명한 주라청周羅廳 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발견됐다.

물론 이런 명문기와는 얼마든 옮겨갈 수 있으니, 그것이 발견된 지점이 곧 주라청이라는 건물이 있던 곳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와 직간접으로 연동하는 건물터 흔적이라든가 다른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는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와 관련해 부석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다가 지금은 송광사성보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옮긴 김태형 선생이 부석사를 떠난 뒤에도 여전히 부석사에 대한 질긴 연을 끊지를 못하고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최근 부석사 일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성과를 바탕으로 부석사 사역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음을 주창하고 나섰으니, 이 양반 부석사에 대한 집념은 거의 집착에 가깝다.

이런 미친 이가 많아야 그 사회는 건전하다 나는 생각한다.

부석사 주라청 浮石寺周羅廳 명문 탁본



참다 못했는지, 아니면 그 발굴성과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다 판단했음인지 개인 자격으로 며칠 전에 보도자료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으니,

이를 토대로 그가 주장한 이번 발굴 발견 성과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당연히 아래서 정리하는 성과는 그의 보도자료를 대부분 활용한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현재는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부석사는 무량수전 자리인 북지리 148번지와 범종각, 천왕문 등의 구역과 동쪽으로는 봉황선원과 동부도전, 서쪽으로는 관음전과 화엄선원 및 서부도전, 북쪽에는 조사당, 자인당, 영산전 등의 전각과 시설이 배치된 모습이다.

그간 부석사 관련 연구나 조사는 현재의 사역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무량수전 동서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넓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부석사 동쪽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220호)이 있던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한때 동방사지東方寺址로 불린 곳이다.

하지만 이는 ‘동방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는 절터’라는 뜻이 잘못 인식돼 그렇게 불렸다. (임천,「영주 부석사 동방사지의 조사」, 『고고미술』2권 7호, 1961 참조)

부석사 주라청 浮石周羅廳 이라는 문구를 반복해서 새겼다. 廳 이라는 글자는 기와에 새기기에는 복잡해서 그 약자 厅으로 썼다.



예전부터 이곳 ‘傳 동방사지’ 일대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만든 기와가 무수히 확인되거니와 개중에는 ‘천장방天長房’이라는 글자를 새긴 명문 기와가 집중돼 부석사 창건 이후 고려말까지 부석사 관련 중요 시설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특히 이곳에 자리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삼신불三身佛로 간주하는 불상이 봉안된 곳이라 해서 대단한 역사적 위상을 지니지만 1958년 약식 조사 후 방치된 상태로 과수원으로 경작되면서 유적 훼손이 심각성을 더해간다.

동쪽 절터는 동방사가 있던 곳이며 그것은 부석사와는 별개 사찰로 취급됐지만 과연 별개인가?

아니면 부석사 부속 시설인가?

이를 짐작케 하는 유물이 바로 이번 명문 기와다.

통화 26년 統和二十六年(1008) 명 기와



지난해부터 부석사 서쪽 사역을 조사하는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이종원 교수가 수습해 부석사성보박물관에 전달한 많은 명문 기와 중에는 ‘부석사 주라청浮石寺周羅廳’, ‘통화 26년 統和二十六年(1008)’, ‘천흥天興(중국 금나라 애종 때 연호, 1232~1234)’과 같은 글자가 있어 이들 기와가 11~13세기 제작품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 이들 글자는 전성기 때 부석사 공간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유물이라는 점을 대서특필해야 한다.

이들 중 ‘부석사 주라청’ 명문기와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격자문 바탕에 글을 새겼다.

주라청에 대한 문헌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주라周羅’는 처음 승려가 되려고 머리를 깎을 때 스승이 가장 나중에 깎아 주는 정수리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승려집단의 출가와 관련된 단어라는 말이다.

‘주라’라는 말을 쓴 용례는 1023년 만든 합천 영암사 적연국사寂然國師(932~1014) 자광탑慈光塔 비문이 있으니, 이에서는 적연국사가 삭발한 뒤 그 머리카락을 따로 보관했다는 맥락을 정리한 ‘소락주라所落周羅’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또 1060년 건립한 칠장사七長寺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에도 국사가 광교사光敎寺로 가서 충회대사忠會大師를 은사로 삼아 정수리에 있는 주라周羅를 잘라 버리고("大師忠會頂落周羅...")라는 구절도 있다.

또한 고려 문종의 장인이자 문신인 이자연 묘지명(李子淵墓誌銘, 1061)에는 그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소현韶顯이 어려서 삭발 출가해 유가업瑜伽業 대선장大選場에 한 번에 급제함으로써 대덕大德이 되었다는("韶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為大徳") 내용에서도 주라 라는 용례가 확인된다.

문제의 유물이 발견된 지점. 아마 지표 수집인 듯하다.


그런가 하면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1072)에서도 국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師自削周羅")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주라’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는 상징성이 크고 부석사 사명寺名과 함께 이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 곳은 지금의 부석사 사역 범위 밖이라는 점에서 전성기 부석사 전체 사역에 대한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는 한편 이 일대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시급함을 제기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