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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당에서 복무한 신라 왕족 묘지명 장안서 발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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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당형 3대손 김영金泳 무덤 출현, 두 차례 신라로 사신 파견 

 

김영 묘 묘지명 뚜껑

 
오늘자 연합뉴스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기도 했거니와

근자 중국 장안에서 그곳으로 질자质子, 이른바 인질로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은 김영金泳이라는 신라 사람 무덤 발굴 소식을 중국 당국이 공개했거니와 

이처럼 한반도에서 유래하는 사람으로 저짝에서 죽어 그 흔적을 저리 남긴 사람이 속속들이 요새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거니와 개중 하나다. 

이 소식이 알려지기는 좀 됐지만, 나 역시 차일피일 미루다가 뒤늦게서야 정리하게 된다. 

그 주된 텍스트는 이 매체 이름이 참 묘하거니와 팽배신문澎湃新闻이어니와, 그 전문이 웨이보를 통해 공지됐거니와,

중국 쪽 보도 특징을 보면, 이런 고고학 발굴의 경우, 기자 자체 취재가 매우 드물고, 중국 당국에서 배포한 것들을 그대로 전재하는 일이 많거니와,

그래서 천편일률인 경우가 많거니와 이 경우는 아예 논문 하나를 그대로 베껴왔다. 

암튼 이 보도에 이르기를 
이번 발굴 성과는 《고고와 문물考古与文物》 제6호 최신호에 《섬서성 서안 당신라 질자 김영묘 발굴 간보 陕西西安唐新罗质子金泳墓发掘简报》를 통해 공개되었거니와

이에 의하면 2022년 6월, 섬서성고고연구원陕西省考古研究院은 서안시西安市 응탑구雁塔区에서 신라 질자 김영묘를 발굴했다.

이는 중국에서는 고고학 발굴을 거친 당나라-신라 질자 무덤으로, 출토된 묘지에는 김영의 생애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대 질자 제도, 당과 신라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무덤은 내부로 통하는 비스듬한 통로인 이른바 사파묘도斜坡墓道 갖춤 천정이 있는 단실토동묘单室土洞墓라 했거니와,

한국식 고고학 표현으로는 이른바 횡혈식묘라, 무덤방은 땅을 파고 내려가 움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 방 한 쪽짜리 매장칸을 만들었다 이런 뜻이다. 
 

김영묘 묘지명 본문

 
비록 도난 피해를 봤으나 여전히 도용陶俑, 탑 모양 항아리[塔式罐], 묘지墓志를 필두로 하는 유물이 발견됐다.

중국 당국은 이에 맞추어 《당신라 질자 김영 묘지 고략 唐新罗质子金泳墓志考略》을 공개했거니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에서 발견된 묘지 몸통과 뚜껑 텍스트 분석이다.

암튼 이에 의하면 김영은 신라 성덕왕圣德王 김흥광金兴光의 당형堂兄 김의양金義让의 손자로, 그의 가문 3대가 내리 질자로 당나라 숙위宿卫로 남아 관직을 받았고,

두 차례 부사副使를 지내며 신라에 대한 당나라 조정의 조제 책봉吊祭册封에 참여했으며, 생전 관직은 신라 번장新罗蕃长에 이르러 교민 관리를 담당했다 한다.

48세 때 김영은 장안에서 세상을 떠나 장안에 묻혔다.

이런 점들이 중요한데, 묘지명이 말하는 질자는 결국 뭐냐? 외교관이다.

이 외교관은 요새와 개념은 좀 달라, 관직을 당나라에서 받았고, 그렇게 받은 외교관이 본국과 주재국을 오가면서 교민 관리도 하고 이를 통해 외교술을 통해 두 나라 관계를 조정한 셈이다. 

이에서 문제는 제1대야 신라말이 모국어겠지만 2대, 3대로 내려가면서?

신라어는 다 망실했을 텐데 그것이 문제 아니겠는가 싶다. 

신라가 이처럼 숙위 입질入质宿卫을 하게 된 시초는 당 정관贞观 22년(648) 신라 여왕의 동생 김춘추(654년 신라 왕위 계승)가 아들 김문왕金文王[사료에 따라 文汪이라 하는데 후자가 맞는 듯하다]을 데리고 갔다가 남겨둔 데서 비롯한 설이 있거니와, 내 보기에도 이 사건이 직접 발단이다. 

사료에 따르면 숙위는 숙위 질자宿卫质子랑 숙위 학생宿卫学生 두 종류가 있다는데, 후자는 숙위가 보기는 힘들어 이는 생각이 좀 필요하다. 

암튼 2022년 4월부터 6월까지 산서성고고연구원은 아무래도 건설에 따른 긴급 발굴이었음에 틀림 없을 듯한데 응탑구 동강촌东姜村에서 발굴조사를 벌여 38곳에 이르는 고대 유적을 찾았다 하거니와 

무덤 중에서는 15번째라 해서 M15[중국고고학에서 보이는 M은 mound 약자다] 무덤은 김영이 묻힌 곳으로 북쪽으로 당 장안성에서 약 2km 떨어진 지점이다. 

이 무덤은 평면이 칼 도刀자 모양이며 장축은 남북 방향이라 볼짝 없이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남쪽으로 쭉 뻗어 누웠다는 뜻이다.

원래 무덤 입구는 현재 지표면 깊이에서 약 4.5m에 있지만 파괴되었다.

남북 수평 총 길이는 10.4미터, 현존 깊이 4m다. 묘도墓道 과동过洞 천정天井 용도甬道 그리고 묘실墓室로 구성된다. 

묘실 윗부분은 현대의 쓰레기 구덩이와 도굴로 파괴되었다.

토동土洞[무덤 몸통을 만든 구덩이를 말한다] 구조는 동서 방향 직사각형이고, 벽은 수직으로 쭉 뻗었고 바닥은 편평하다.

남북 길이 2.7~2.8m, 동서 너비 3.6m, 남은 높이 2.4m다.

묘실은 도난당해 장례 도구 흔적과 관못 흔적만 남았다.

목관은 묘실 서쪽에 위치하며, 평면은 사다리꼴이고 북쪽은 넓고 남쪽은 좁다.[목관 자체가 이렇다? 뭔가 기술이 이상하다.] 길이 2.2m, 너비 0.8~1.2m, 잔고 0.6m다. 인골이 없어 장례 양태는 불분명하다.

무덤에서 출토된 각종 껴묻거리는 총 83점(세트)으로 도용陶俑, 도동물陶动物, 도탑식 항아리陶塔式罐, 동전, 묘지 등 묘실 내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김영묘 출토 동물상

 
도용은 22점으로 천왕용天王俑, 진묘수镇墓兽, 견마용牵马俑, 흉상용胸像俑, 생초용生肖俑 등이 있으며 균니질 홍도均泥质红陶에 모형[명기라는 뜻이다]으로 제작되었다.

도동물은 총 58점으로 낙타, 말, 소, 양, 돼지, 개, 닭이 있으며 모두 진흙질 홍도, 모형이다.

도기 1점으로 탑식 항아리이며, 동전 1조 2점으로 모두 개원통보开元通宝이고, 묘지 1합이다.

묘지는 청석질 青石质 이며, 뚜껑盖과 지志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묘지명 뚜껑은 사각형이며 상단에 구름 무늬云纹와 보상화문宝相花纹를 음각하고, 네 귀퉁이에 모란 무늬를 음각했으며, 중앙에 전서체로 '대당 고 김부군 묘지명 大唐故金府君墓志铭'이라는 글자를 음각했다.

몸통 돌인 지석志石은 정사각형이며, 네 면에 구름 무늬를 넣었고 지면에다가 바둑판 모양으로 선과 칸을 만들어 글자를 적었으니 해서체로 새긴 글자는 총 557자다.

묘지에 따르면, 이 무덤 주인은 당나라의 신라 질자 김영으로, 당 천보天宝 6년(747년)에 태어나 당 정원贞元 10년(794년)에 장안성长安城 태평리太平里 관제馆第에서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직 중 사망이라는 뜻인 듯하다.]

집안은 3대가 모두 질자质子다.

김영 묘지 고략(저자는 하배조夏培朝와 위성魏铖이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신라 왕족 묘지는 당나라 대력大历 9년(774년) 김일성金成员 묘지만 알려졌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이번에 새로 나온 김영 묘지는 처음으로 고고학 발굴을 통해 출토된 신라인 묘지로, 배경 정보가 명확하다.

지문志文은 김영 본인과 그 선대의 여러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당과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묘지에 따르면, 김영은 신라 성덕왕 김흥광의 사촌 김의양의 손자로, 그의 가문 3대가 질자 신분으로 당나라에 남아 숙위하고 관직을 받았으며, 두 차례 부사를 맡아 신라에 대한 당나라 조정의 조제 책봉에 참여했다.

김의양은 당 현종 개원 開元초년에 신라 왕의 파견을 받아 당숙위唐宿卫에 들어갔으며, 당나라에 들어간 후 벼슬을 받았고, 지문에 기록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禄大夫, 시태상경试太常卿"이 그의 최종 벼슬이 되었다.

《고략》에 따르면, 김의랑은 전해지는 문헌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릉定陵 능원 번추상蕃酋像에서 볼 수 있다.

2016년, 산서성고고연구원은 정릉 묘원 유적에서 두 개 번추상 잔해를 발견했으며, 그 중 몸통 부분 잔해 등 부분에는 '위장卫将'과 '김의양金义让' 다섯 글자가 남아 있었다.
 

김영묘 출토 도용류


지문에 따르면, 김의양한테는 세 아들이 있어 당나라 조정에 머물게 했으며, 그 중 장남이 김영의 아버지다.

그곳에는 김영의 아버지가 당나라 조정에서 받은 관직이 중산대부中散大夫, 광록소경光禄少卿이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지문에 따르면 김영의 질자 신분은 아버지를 계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김영의 아버지도 질자였다.

《고략》에서는 당나라 시대四夷의 질자 중에서 오랫동안 당나라에 거주하며 대대로 질자로 사는 현상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입당숙위 인선을 보면 신라가 간여한 흔적은 없다고 보인다.

그러나 안사의 난 安史之乱 기간 동안 당과 신라의 교류가 한때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신라는 새로운 숙위 질자를 파견할 수 없었다.

당 조정은 김영과 그의 아버지를 질자로  임명하여 두 나라의 일을 처리하게 했다.

지문에 따르면, 대력大历 3년(768)에 김영은 처음으로 선위부사宣慰副使로 임명되어 귀국했다.

덕종德宗 정원贞元 원년(785년)에는 김영金泳이 두 번째 부사로 신라에 갔다.

처음 신라에 가기 전 김영은 벼슬이 낮은 허직虚职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신라에 부사副使로 출사하자, 새로 책명된 신라 왕 김경신金敬信이  당나라 조정에 주청해 번장蕃長을 겸직하도록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략》에 따르면, 번장蕃长은 당송 시기에 외국 교민 사무를 관리하는 데 사용된 관료로, 일반적으로 외국 교민 중에서 명망 있는 인물을 선발했다.

경력이 풍부한 김영이 번장에 임명된 것도 이치에 맞으며, 김영은 현재 본 사료 중 유일하게 신라 번장을 맡고 있다.

정원 10년, 48세의 김영은 세상을 떠났고, 그 동안 그는 다시 승진하지는 않았다.

김영은 세상을 떠난 후 사지절使持节, 도독 등주 제군사都督登州诸军事, 등주자사登州刺史라는 관직을 추증받으니 등주도독은 정3품이다.

등주는 발해의 중요한 항구이자 신라가 당나라로 사절을 파견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김영의 등주도독 추증은 신라인의 특수한 신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영이 세상을 떠난 후, 장례는 공가에서 치렀고, 지문에 기록된 김영의 장사를 담당하는 관리는 장안현령长安县令이었으며, 묘지와 관도 황제의 조서에 의해 하사되었다.

이는 당나라 조정에서 그를 특별히 중시하고 은총을 베풀었음을 나타낸다.

당나라 신라인들의 혼례에 대해서는 김일성金日晟 묘지에 부인 장씨張氏라고 기록돼 있을 뿐 출신은 알려지지 않았다.

김영 묘지에는 김영의 부인이 고문 씨족高门氏族에 속하는 태원 왕씨太原王氏 출신으로, 언사현령偃师县令 왕천령王千龄의 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김영은 9남 3녀를 두었는데, 사망 당시 성인은 3남 1녀뿐이었다.

《고략》은 김영의 묘지가 당과 신라의 관계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실물 자료를 제공했다고 본다.

최초로 과학적으로 발굴된 당나라 신라 왕족 질자 묘지로서, 그 지문은 김영 가문의 입당 맥락과 정치 생애를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질자 제도, 외교 전략 및 문화 교류의 구체적인 구현이기도 하다.

김영 가문 삼대를 당나라가 질자로 삼은 경험은 당대 '질자 숙위' 제도의 연속성과 기능성을 입증했다.

김의양에서 김영에 이르는 3대가 질자 신분으로 고위 관직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번이蕃夷 상층부에 대한 당나라의 '먼 사람 회유怀柔远人' 정치 전략을 반영한다.

김영이 두 차례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번장을 겸임한 경험은, 외교 업무에서 질자 집단의 교량 역할을 부각시켰다.

그들은 이중의 정치적, 문화적 신분을 바탕으로 당나라 조정을 도와 종번宗藩 질서를 유지하고 신라 교민들을 관리했다.

묘지의 세부 사항은 시당 신라 왕족의 문화적 적응과 신분 재구성을 반영하며, 숙위 질자가 당나라 관리 여성과 결혼하고, 자손은 유업을 배우고 과거를 답습하여 질자  후손들이 결혼과 교육 등을 통해 점차 당대 사회에 융합되는 경로를 보여준다.

묘지명 원문은 아래와 같다. 

唐新罗国故质子蕃长朝散大夫试卫尉少卿金君墓志铭

广文馆进士从侄良说撰

维唐贞元十年五月壹日,试卫尉少卿、质子、蕃长金君终于京兆府太平里之馆第。鸿胪以奏,圣上宸悼,锡以优例,诏赐使持节、都督登州诸军事、登州刺史,赙赠疋帛。及葬日,官给车轝、缦幕、手力,兼赐诏祭棺椁、墓地等,仍令长安县令专知葬事者。以其年八月十四日,窆于城南毕原之北府君叔父之次,礼也。

君讳泳,其先祖即本新罗国故王堂兄,开元初以差入朝宿卫,于皇朝授金紫光禄大夫、试太常卿,讳义让,则君之祖也。因宿卫而有三男留于阙下,其长子皇授中散大夫、可光禄少卿,则君之考也。以父之胤而袭其质者,则君也。

大历三,恩命差为宣慰副使还国,授将仕郎、试韩王府兵曹参军。宣命毕而复归,恩命优加重赏,授朝散大夫、试太子洗马。丁太夫人忧,居丧三年,哀过于礼。服阕,以贞元元年本国王薨,又差为吊祭册立副使,拜试卫尉少卿,再奉于使往来,勒劳沧海。遂本国王特奏官兼蕃长者,风俗广通于海隅,礼义大兴于东国。

因遘疾而不□, 春秋卌有八。呜呼!君自为卿长以来,两国使命,见者无不称其德,朋友无不称其贤。不寿而终,时人惜也。夫人太原王氏,东畿偃师县令千龄之子也,贤比姬姜之淑女,贵则卿监之夫人,其贞元四年四月十四日逝于同馆,权厝于城南之原。

有男九人:嗣者士素,应明经举;次曰士弘;次曰士烈,尊君痼疾,愿为父出家。女子三人,长者已适事人。余者悉幼,而乃抱棺泣血。良说忝为从姪,故录其功列,述兹遗行,冀宣孝训, 不饰其文。

铭曰:哀哉月卿,化为异灵。旧质圣朝,魂寄幽冥。卜地南岗,镌石记名。

澎湃新闻记者 王健

(本文来自澎湃新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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