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되치기 당한 이야기하기에 앞서 내친 김에 연암이 바라보는 당시 불교계 진단을 짚어봐야겠다.
이를 위해 먼저 불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소환할 필요도 있거니와,
번다해서 구체 사례를 열기하지는 않겠지만,
당시 사대부 불교에 대한 전반하는 생각이 연암이라고는 예외가 될 수는 없어,
이단이라는 관점은 유효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천주교에 대해 그랬던 것과 같은 극단하는 불교 배척주의자였다고는 하기 힘들다.
그건 왜인가를 곰곰 따져보면
그의 시대에 이미 불교는 더 이상 체제 위협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 정도는 봐줘도 상관없다 하는 그런 인식이 깔렸으니,
이것이 그를 상대적인 불교 온전주의자로 보이게도 할 것이다.
당시 압도하는 위협은 천주교였다.
조선왕조는 갖은 악랄한 수단 동원해 수백년 동안 불교 누르기는 성공했지만,
그 자리를 천주교라는 새로운 서양귀신이 치고 들어왔으니,
단, 연암이 이 천주교도에 대한 처벌에서도 그리 강단은 있는 모습은 아닌 듯하니, 이는 천성이 그런 듯하다.
물러터진 할배? 그런 느낌이다.
연암집 제7권 별집으로 들어간 종북소선鍾北小選에는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라 해서 풍악당이라는 책에 부친 연암 서문이 있거니와,
유감스럽게도 이 풍악당집楓岳堂集은 당시 불교 승려 보인普印(1701∼1769)이라는 사람 문집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국조國朝(조선왕조 개창을 말함-인용자) 이래로 유교를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대부들이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엄격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독자로 행동하고 스스로 체득하는 선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른바 이단의 학설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그 황폐화한 사찰에는 사는 승려가 여전히 끊이지 않으나 모두 궁핍한 백성과 굶주린 종들로서
군역軍役을 도피하여 머리 깎고 검은 장삼을 입는 자들이라,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道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이 이야기에 앞서 그 이전 불교를 어찌 평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
실제 바로 저 문장 앞 연암 기술은 이렇다.
옛날에 승려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총명하고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들이라
한 번이라도 임금이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그에게 호號를 내리고
예를 달리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스승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당시 사대부들 역시 모두가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행을 하며 숨어 지내고 조용히 있어도 도리어 부귀와 영화가 뒤따르니
이것이 본디 불문佛門의 본분은 아니지만 불교를 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간단히 말해 고려 시대 이전은 똑똑하고 문장도 잘하며 행동거지도 뛰어난 인재가 불문에 즐비했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그네를 권력이 일망타진하는 바람에 쭉정이만 날리게 되었으니,
특히 군대 안 가고 강제 부역 현장 동원되기 싫은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는 바람에 오징어잡탕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도 모르는 승려 천지가 되고, 시정잡배 범법자가 우글거리는 곳이 되었다는 진단이다.
이는 내가 정리하는 한국불교계 흐름과 실은 맥락이 아주 쏙 맞아떨어지는 구절이라
나는 항용 저 불교 탄압 시대에도 불교가 버틴 힘은 어사일럼asylum과 고시원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을 계속하거니와,
헐벗고 주린 사람들이 갈 데 없을 때 마지막에 품어준 데였다.
그 사상 종교를 용인하느냐 마느냐 여부는 결국 그 성직자로 어떤 사람들이 입문하느냐에 달렸으니,
고려시대 이전은 무엇보다 왕자들이 불문에 들어갔고,
때로는 왕실 여성 어른, 예컨대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실상 절로 은퇴하는 일이 그리 많았다.
뿐만 아니라 명문거족 가문에서도 한두 명쯤은 똘똘한 아이를 골라 불문에 출가케 해서는 박아놨으니,
김부식 형제만 해도 그 막내인가가 승려로 출가했다.
연암 말마따나 그러니 저 시대 불교가 발한 빛은 찬란해,
연암이 진단하기를 그런 내력들이 불교 자체를 홍보하는 데도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가 개막하면서 무엇보다 승려가 되는 자로써 똑똑한 사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문정왕후 섭정기에 잠깐 그 회복의 기운이 있어 이때 제법 똑똑한 승려가 배출되었으니 서산대사 휴정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연암의 말마따나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道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왜 연암이 불교에 대체로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앞서 말했듯이 간단하다.
더는 체제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흠씬 두들겨 패서 그로키로 만들어 놓았으니, 더는 반격을 하지 못한다는 이 안심이야말로 조선후기 체제가 바라본 불교였다.
그 안심 스테이크를 삼키면서 더 거대한 체제 위협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것이 천주교였다.
이 천주교도 조선왕조는 결국은 때려잡았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어, 그리 때려잡은 천주교도의 시신을 밟고서 식민지시대 미국발 개신교도들이 들이닥쳤으니,
이제는 탄압도 불가능한 무풍지대가 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한국사의 이른바 만신萬神의 시대, 종교 전시장이 된 것이다.
*** previous article ***
불교 우습게 봤다 되치기 당한 연암 박지원[1]
'역사문화 이모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 우습게 봤다 되치기 당한 연암 박지원[1] (1) | 2025.01.21 |
---|---|
전장에서 적을 직접 처단하는 람세스, 하지만 개사기는 개사기일 뿐 (0) | 2025.01.21 |
삼국사기 신라 직관지의 미스터리, 내명부 담당 관청이 없다! (1) | 2025.01.21 |
형님 얼굴에 비친 아버지, 그런 형님이 가버리니 (2) | 2025.01.20 |
이덕무 행장에서 유념할 대목들 (0) | 2025.0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