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Archduke Franz Ferdinand of Austria posing as a mummy in Cairo, Egypt, 1894.
이 장면을 어찌 봐야 하는가?
나는 미라가 대중문화에 파고드는 한 과정, 그 드라미틱한 순간으로 간주한다.
미라에 대한 관심은 오래되었지만, 19세기 이래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하니 그것이 바로 대중소비문화와 결합을 급속도로 강화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라 혹은 그에 버금하는 존재를 소재로 삼은 대중문화물이 넘쳐난다.
특히 영화가 이 분야를 주도하는데, 끊임없이 미라를 소환한 이 흐름이 앞으로는 또 어떤 방향으로 튈지 모르겠다.
그 대중문화가 소환한 미라는
1. 공포
2. 애틋
이 두 가지로 대별하거니와
고대 이집트를 소환하는 미라 영화들이 대체로 1에 해당하고
천녀유혼은 후자를 대표한다.
그 어중간에 저 사진이 포진한다.
이제 미라가 뭔가 이국 풍경, 이그조틱으로 치환함을 본다.
그렇다면 저 사진 속 주인공 Archduke Franz Ferdinand는 누구인가?
위선 이름이 열라 길어 Archduke Franz Ferdinand Carl Ludwig Joseph Maria of Austria (1863~1914) 라,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오스트리아 대공
이라 이름이 길다 함은 타이틀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뜻이다.
생몰년을 보면 한창 나이에 훅 갔다.
한데 페르디난트 대공? 어디서 익숙한 이름이다.
그래 맞다. 1차 대전 총구를 당긴 그 피암살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위 계승자로 간주되는 인물로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함으로 제1차 세계대전 총구가 당겨졌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동생이자 오스트리아 카를 루트비히 대공 장남이다. 1889년 루돌프 황태자가 사망하고 1896년 카를 루트비히가 사망한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왕위 계승권자가 된다.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는 사라예보에서 19세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한테 암살당한다. 이것이 이른바 7월 위기로 이어져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 선포를 촉발하고 이는 마침내 세계대전으로 간다.
한데 그가 왜 이집트? 미라?
1894년 대공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이집트를 방문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유럽 정치에서 벗어나 탐험을 즐길 수 있었다.
카이로에 있는 동안 프란츠 페르디난드는 동료들과 함께 경쾌한 장면에서 미라 역할을 하며 장난스러운 순간에 참여했다. 이는 당시 많은 유럽인이 고대 이집트에 대해 지닌 선호를 반영한다.
미라화가 된 그는 결국 총구에 이승을 마감한다.
'미라 이야기 > 기타_준비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가 미라화로 열반을 완성한 승려 (1) | 2025.03.07 |
---|---|
16세기 에콰도르 미라 수사에서 뽑아낸 고대 질병 (2) | 2025.03.06 |
[페루 미라] TMI? 선인장으로 꿰맨 입 (0) | 2025.03.02 |
페루 미라와 조선시대 미라 (21) | 2025.03.02 |
가장 연로하신 아기 미라 (0) | 2025.03.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