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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광세대전曠世大典, 중국사의 봉선 封禅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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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정상

 
이 봉선 비스무리하게 간 이벤트는 아래 열거하는 일 말고도 여러 번 있었고,

또, 신하가 주최가 된 봉선도 흉노 정벌에 나선 곽거병의 거련산 봉선이 한 차례 있었지만, 군주에 의한 공식 봉선은 아래 열거하는 열네 번이 전부다. 

군주로는 역대 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이 봉선이 광세대전曠世大典이라는 별칭이 시사하듯이 규모가 국가 재정을 휘청거리게 말 만큼 컸기 때문이고, 나아가 무엇보다 그 효과에 대한 의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허례허식이라는 인식이 그때도 만만찮았다. 

나아가 봉선은 그것을 성립 가능케 하는 절대 조건들이 있으니,

무엇보다 국내외 정세 안정과 경제 융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조건을 구비한 때가 역사상 얼마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실제 봉선을 치르고도 나라 망쳤다는 개망신이 따르기도 했으니

저 의식을 치른 군주 치고 말세가 좋은 황제가 없다.

다 우롱당했으니 그런 까닭에 군주는 저 의식 한 번 치르고 싶었지만 주저주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하들 생각은 달랐다. 군주의 이름을 내세운 자신들의 성과를 치장 홍보하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었으니 이때를 계기로 한 몫 땡기기 때문이었다.

봉선제는 진행상황을 보면 실은 군주와 공신이라 칭하는 권신들 사이의 길항이라는 측면이 무척이나 강하다.

봉선은 간단히 말해 하늘을 대리해 그 권능을 위임받는 지상의 절대군주가 태평성세를 이룩했음을 천신天神과 지기地祇한테 고하는 의식이라

세분하면 천신께 감사하는 封과 지기한테 감사하는 禪 두 가지로 대별하며, 개중에서도 천신을 향한 봉제封祭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 제장祭場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 태산泰山과 그 주변 얕은 산이었지만, 이는 고정이 아니라 오악五岳은 그 대상이 다 되었다.

실제로 아래에서 보듯이 무측천의 경우는 태산 대신에 숭산崇山을 선택해 봉선대전封禪大典을 치렀다. 

그 이전 당조唐朝가 태산 봉선을 했음에 견주어 차별성을 부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태산 무자비泰山无字碑라 한 무제汉武帝 태산 봉선 때 세운 것이라 하지만 근거는 없다.

 
秦朝
진시황秦始皇 始皇二十八年(前219年),封泰山、禅梁父山

西漢
무제 유철 武帝劉徹
元封元年(前110年),封泰山、禅肃然山
元封二年(前109年),封泰山、祠明堂
元封五年(前106年),封泰山、祠明堂
太初元年(前104年),封泰山、禅蒿里山
太初三年(前102年),封泰山、禅石闾山
天漢三年(前98年),封泰山、祠明堂
太始四年(前93年),封泰山、禅石闾山
征和四年(前89年),封泰山、禅石闾山

東漢
광무제 유수 光武帝劉秀 建武三十二年(56年),封泰山、禅梁父山

唐(含武周)
고종 이치 高宗李治 乾封元年(666年),封泰山、禅社首山
천책금륜성신황제 무영 天册金轮圣神皇帝武曌 만세등봉 万岁登封 元年(696年),封太室山、禅少室山
현종 이륭기 玄宗李隆基 開元十三年(725年),封泰山、禅社首山

北宋
진종 조항 真宗趙恒 대중상부大中祥符 元年(1008年),封泰山、禅社首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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