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크롬이 뭐하는 기관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간단하게 말하면 연수원이다.
문화재 관련 국제 연수원. 공무원 연수원같이 직무수행하는데 필요한 부분들의 내용을 꾸려 교육과정 운영하는게 주력이고 그런 교육 과정을 꾸리기 위한 연구 조사 협력을 하는 곳이다.
다만 국내 기관과 다른 점이라면 특정하게 정해진 틀이나 절차에 맞춘 내용을 교육할 수 없기 때문에 해당분야에 있어서 좀 더 원론적인 내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한 내용조사와 심화연구가 진행된 상태에서 교육 과정을 꾸린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
하는 일이 교육과정 운영이다 보니 전세계 각지의 유산 관리자들을 많이 만나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백이면 백 모두 다른 곳의 보존관리계획 샘플이 있는지, 등재신청서 샘플이 있는지, 영향평가 샘플이 있는지... 다른 사례 달라고 요청하는게 가장 빈번하다.
그럴 때마다 참 난감하다. 완벽한 사례라는거, 최고의 사례라는거, 선진 사례라는거,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우리와 달라서 좀 다른 효과가 난다거나, 이러이러한 의사참여 과정은 좀 더 폭넓게 이행을 하는 절차가 수립되어 있다거나 하는 등,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특징적인 사례라는 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 유산의 보존관리계획이 제일 훌륭해요, 내지는 여기 관리체계가 가장 효과적인 체계예요- 라는 두루뭉실한 평가는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해서 이 사례가 참 좋은 사례라고 소개를 받으면 거의 70-80 프로는 잘하고자 하는 좋은 마음에 그걸 충실히 베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늘 별로다. 내가 처한 상황과는 전혀 맥락에서 나온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 상황에 그대로 베껴 적용해 오류가 생기거나, 남이 잘한거 따라가느라 내가 기존에 잘하고 있던 부분들까지 다 버리고 외려 하향평준화되기도 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 다 다른 유산에 대한 보존관리 방법이 원치않게 획일화 되고 틀에 맞춘 듯 경직되어 버린다.
성문법으로 운영되는 국가에 관습법 체계인 나라 정책 주면 망하고, 연방체계로 운영되는 곳에 중앙정부형 정책을 소개해 줄수도 없다.
그런데 사례를 거론하기 정말 좋은 건들은 무엇이냐. 뭔가에 실패한 정책, 효과를 내지 못한 계획 등등이다. 실패사례는 우리가 쓸수 있다고 허락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공유한다.
실패에서 배우는 내용은 정말 명확하고 핵심을 찌르고 이보다 더 효과적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현장에 늘 요청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보존관리하면서 제일 해결 안 되는 문제, 어려운 문제, 계속 실패한 부분을 알려주세요. 그걸 교육과정에서 논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과정 내에서 정말 충실하고 심도깊은 논의들이 나오게 된다.
외부 기관, 외부 관리자, 그것도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이 부분 부족하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그걸 솔직하게 공개하고 나면 아무도 그걸 우습게 보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좀 더 발전하고자 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왜 장황하게 교육과정을 이야기하느냐. 세계유산제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협약의 실패를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세계유산협약이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 부분이 어디인가.
1.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영구불변한 가치로 고정시켜 변화하지 못하게 제도를 구축한 점.
가치는 사람이 부여한다. 우리가 지금 일제시대 때의 가치로 살지 않듯, 특정한 유산에 어느 한때 부여한 가치가 지금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가치변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변화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오래 보존하고 싶은 가치를 더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유산은 OUV를 한번 고정해 놓으면 거의 변경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강고히 구축해놨다. 이것이 갖는 장점도 있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단점이 훨씬 크다.
기본법이라는 체계를 만드는데 적어도 50년 내지는 100년에 맞춘 큰 그림을 그리려면 당장 20년 후의 문제가 아니라 50년 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보존관리만을 주문한 체계.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세계유산목록에 진입할 수 있는 입학시험 척도이다. 한마디로 그냥 자격 요건. 그게 충족되고 나서 충분조건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보존관리는 여기에 국한될 수도 없고 제한되어서도 안 된다.
어느 한 유산을 보존관리하는 계획을 세울 때는 해당 유산에 존재하고 있는 폭넓은 가치, 즉 무형이나 지역적 가치까지도 모두 포괄하는 방향으로 꾸려져야 한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조항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회탈춤을 완전히 별개로 관리할 것도 아니고. 하회마을의 수많은 가옥 중 직접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을 단위에서 통합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세계유산은 등재 심의를 OUV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느라 보존관리 역시 OUV에 대한 것을 포함하면 되는 것으로 한정지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냐.
매년 150건도 넘게 보존관리현황 보고 올라오는 내용들 살펴보면 적나라하다. 유산 자체의 등재가치를 관리 못한 경우는 아주 적다. 대부분 통합적으로 해당 지역에 있는 동반 가치가 관리 안 되서 무너지고 그것이 OUV까지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3. 정기적인 중간점검 및 평가가 없는 제도.
세계유산의 가장 큰 맹점은 등재에만 모든 에너지가 소비되고 보존관리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 체계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번 세계유산이 되고 나면 다시 재평가하거나 체제를 정비할 계기가 없다.
6년마다 하는 정기보고 있지 않느냐 한다. 정기보고는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작성해서 우리 이렇게 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절차이고 그냥 어떠한 현상이 있는지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이지 그 결과로 평가를 받아서 뭔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제도라는 것, 절차라는 것, 결국엔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솔직해져야 한다. 검사 안 하는데 열심히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가끔 시험본다 쳐도 그 시험으로 인해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거나 결과가 없으면 누가 그 시험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임하겠는가?
그게 적나라하게 보이는 부분이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경우만 봐도 그렇만 세계유산 등재에 각 국가가 투자하는 폭발적인 관심, 의지, 재정 및 인력 지원은 등재가 성공하고 나면 아주 정직하게 사그라든다.
즉 등재를 위한 염원으로 발현된 동력을 등재 이후까지의 보존관리에 대한 이행과 의지로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 세계유산 제도의 가장 큰 실패다. 이것을 거울삼아 매6년마다 재평가하는 제도를 장착한 게 지질공원 제도이다.
유산이 될 방법을 체계적으로 마련했고 유산이 될 분류를 명확하게 구분했으면 그 유산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확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행하지 않을시 유산에서 해제될 방법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출구전략 없는 제도는 고인물이 되고 망할 수밖에 없다.
4. 세계유산을 속세와 동떨어진 완전무결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열망.
세계유산협약은 세계유산구역과 아닌 구역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만들고 유산구역 안을 보존하는 것에 모든 노력을 다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거꾸로, 보다 넓은 지역 안에서 이 유산이 어떻게 이용되고 활용되고 기능하는지에 대한 접근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세계유산은 유산인 곳과 유산이 아닌 곳을 구분하고 가르는 것에만 집중했지 이를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실패를 지금 톡톡히 겪어내고 있다.
지금 보존관리에 대한 문제를 겪고 있는 세계유산들 거의 대부분이 유산구역 밖에서 가해지는 압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유산 구역 안에서 큰 문제 벌어지는 곳은 몇 안 된다.
위에 4가지에 반복되어 모두 나타나는 요소가 하나 있다. 유산의 가치, 보존, 관리에 기여하는 사람의 역할을 규명하고, 절차를 세우고, 지원하는 체계 정립이 부재하다는 것.
대상물로서 건물, 유적지, 기념물과 같은 유산이 건강하거나 망가지는 것에만 집중을 할 뿐, 그 유산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조직이 구비되어 있는지, 절차가 마련되어 있는지, 인력을 수급할 수 있는지 등 그 관리 체계에 대한 밀도 있는 진단과 고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맹점이다.
국제규범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그 규범이 어디에서 실패를 했고 지금 무엇을 넘어서려 하는지에 대한 진단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도 평가해야 한다.
이름만 국제규범일 뿐 어쩌면 내실은 다 썩어가고 있는 제도에 맞추느라 우리가 훨씬 잘하고 있는 부분들을 우리도 모르게 먼저 내다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리고 지금 기능하는 국제규범이 어디에서 성공을 하고 어디에서 실패를 했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과정을 수립해 적어도 이미 범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이점을 우리가 취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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