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보름 정도는 이 양반을 죽어라 팠다.
김재근金在瑾..한국선박사 조선사에서는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연구자요 조선공학도다.
서울대출판부라는 데서 이른바 학술서적이라 해서 그 특유한 판형 디자인으로 내던 시절 거의 유일한 한선韓船 연구서는 그의 독보하는 업적이었다.
그가 이 책을 내던 시절 그 실물이라 해봐야 안압지 통통배랑 신안선이랑 완도선 꼴랑 세 척이었으니 그의 지난한 삶을 알겠다.
한선은 평저선이라는 선언도 저때 나온 것으로 안다.
다행히 그는 수상록 회고록 자서전이라 할 만한 글도 제법 남겼으니 어찌하여 개중 하나가 헌책방서 나한테 용케 걸려들어 궁금하던 차 그를 파게 되었고
또 그를 통해 한국선박사와 한국 조선사까지 얼추 따라가게 되었다.
다만 내가 안타까운 점은 나는 저 양반을 직접 접촉할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학술원회원까지 지내고 1999년 타계했으니 부고기사는 아마 내가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나로선 문화재 학술담당 초창이었다.
약력 보니 1920년 평안도 용강 월남인이며 평양에서 중학교 과정을 끝내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 갑류에 들어가 청량리를 기숙하다가 본과로 되면서 동숭동 생활을 시작했다.
1941년 3월, 경성제국대학 기계공학과 1기로 들어가 아마 태평양전쟁통 때문이었다 짐작하지만 1943년 9월에 졸업하고는 인천 조선기계제작소에 들어가 전함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다 해방을 맞는다.
이 과정들은 나중에 다시 정리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이력 하나하나가 한국근현대사 응축이라
더구나 그는 선친보다 불과 한 해 먼저 태어나고 더구나 선친보다 불과 1년 뒤에 갔으니 같은 시대를 호흡했지만 너무나 다른 길을 걸은 그에게서 선친이 가지 않은 다른 길을 반추한다.
선친이 탄광노무자로 끌려간 것과는 달리 그에게서 이렇다 할 강제동원 흔적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의 전공 및 직장과 밀접하리라 본다.
조선소에 들어간 이유도 징용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대목 그 자신은 침묵한다.
절제한 것이고 분란을 피하고자 부러 숨긴 것이다.
그에게서 이런저런 이유로 증언 하나 따지 못한 또 다른 아버지가 어른한다.
아버지는 한글을 몰랐고 말도 없었으며 그런 까닭에 스스로 당신 삶을 남길 수 없었다.
못난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한없이 옆에 계셔줄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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