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기 立齋記
바야흐로 입재공(立齋公)의 두건, 신발이며 궤안(几案)이 남은 이 서재는 의심스럽고 판단이 어려운 문제를 처리하려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찾아 왔으나, 평소에 의롭지 못한 자는 주저하며 들어오기를 꺼렸다. 서재가 서재다웠던 것은 공의 자태와 어묵(語默)에 달려 있었으므로 편액을 만든 일이 없었는데 더군다나 기문이겠는가.
공이 세상을 떠나고 30년이 지나 사자(嗣子)인 봉진(鳳鎭)은 그 서재를 비워두고 두어 마장[數帿] 되는 곳에 옮겨 살았다. 봉진의 아들로 양자로 나간 양연(亮衍)이 선조의 자취가 장차 없어질까 두려워 모든 것을 견고하게 만들고자 꾀하고자 해서 기와를 구워 초가지붕을 대체하여 오래가게 하고자 하였다. 약속을 정하고서 먼저 고(故) 옥류거사(玉流居士) 이삼만(李三晩)이 쓴 ‘입재(立齋)’라는 두 큰 글자를 판자에 새겨서 문미(門楣)에 걸고 그 사실을 기록하는 글을 족부(族父)인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 정진은 공에게는 종부형(從父兄)의 아들이 된다. 평소 넘치는 사랑을 받아 마치 친아들 대하듯 하셨으며 공과 함께 지나간 역사를 얘기하고 마음속 일을 말할 때는 벗과 같았다. 그리고 큰 재질을 지녀 등용될 날을 기다린다며 권장하여 추어올리기가 또한 과분하였으니 은혜가 깊고 의리가 중하다. 입재공 유적에 관계된 일인데, 어찌 감히 늙어 글짓기를 폐하였다고 스스로 변명하겠는가.
일찍이 최간이(崔簡易)가 지은 두 현인이 붓을 전한 노래를 보면, 그 첫 구절에 “공은 서른이 못 되어 확고하게 섰다. [公未三十立]”라고 하였는데, 공은 나의 작은집 선조이신 복재공(服齋公)을 가리킨다. 성인께서 “서른에 확고하게 섰다[三十而立]”고 분명히 말했는데, 지금 “서른이 못 되어 확고하게 섰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 아닌가?
아, 그렇지 않다. 성인과 현인은 스스로 분수가 있게 상응하여 확고하게 세워서 규모와 강령(綱領)이 견실하여 사물에 이끌려 어지럽힘을 당하지 않고 시속에 따라 일거일동(一擧一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현인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없으나, 굳이 꼭 서른 살이 되기를 기다릴 것은 아니다. 공이 우뚝하게 스스로 확고하게 선 것은 대개 타고난 자질에서 얻은 것이었으니, 내가 말한 서른이 못 되어도 확고하게 선다는 것에 공이 실로 근사하다.
우리 가문에 아버지 항렬(行列)인 두 분은 타고난 자질이 고매한데 한 분은 진사 재린(在麟)이요, 또 한 분은 입재공이다. 진사공(進士公)은 아름다운 옥과 같아 더럽힐 수가 없었고, 입재공은 곧은 화살대와 같아 꺾을 수가 없었으니, 천성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쇠퇴한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분들이었다. 성취한 학문으로 정묘한 해석을 치밀하고 철저하게 하는 것으로는 오직 입재공께서 그렇게 하셨다. 뜻을 세우고 마음을 세웠다고 말씀하신 것은 대개 일찍이 자부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던 것인데 이윽고 이 서실이 마침 서른 나이에 완성되었다. 이것이 이름을 정한 자초지종이다.
이 터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박 정혜공(朴貞惠公) 수량(守良)의 옛터라고 구전(口傳)되지만, 믿을 만한 자취와 근거는 없다. 우리 집안이 장성으로 내려온 이후로 10세 분묘가 대부분 뒷산 안팎에 있으니, 종조(從祖) 근재공(謹齋公)께서 복흥(福興 순창군 복흥면)에서 타향살이를 면하고 돌아와 비로소 산을 사들여 집을 지은 것이다. 지세가 높고 건조하여 불대산(佛臺山) 여러 봉우리가 외조(外朝)가 되므로 멀리 바라보면 아름답다.
아, 가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고향의 구택(舊宅)을 공경하려는 양연의 뜻은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여 느끼게 한다. 그런데 입재공이 확고하게 세운 것은 무슨 일이었던가? 바라건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강론하는 가르침을 지켜 손상시키고 않은 뒤에야 입재공께서 어쩌면 “나에게 훌륭한 후손이 있어 기업을 버리지 않았도다.” 라고 하실 것이다.
[주석]
* 입재공(立齋公) : 기재선(奇在善, 1792~1837)으로 자는 경지(敬止)이고 입재는 그의 호다. 생원 태검(泰儉)의 아들이요 생원 봉진(鳳鎭)의 아버지이다. 1822년 생원에 입격하고 성리학에 매진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입재는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河南) 마을에 있었는데 이후 손자인 기삼연(奇參衍)이 살면서 성재(省齋)라는 당호도 사용하였다. 입재에서 기정진을 비롯하여 윤진(允鎭), 익진(益鎭), 기진(麒鎭), 아들 봉진(鳳鎭), 승지를 지낸 문현(文鉉) 그리고 사위 민기혁(閔麒爀), 김요겸(金堯謙)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고,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거나 생원이다. 기정진은 입재(立齋) 종숙(從叔)을 스승으로 일컬었다. 《입재집(立齋集)》 필사본 1권이 종가에 전한다.
* 봉진(鳳鎭) : 기봉진(奇鳳鎭, 1809~1886)은 자가 현도(現道)이고 호는 만포(晩圃)다. 1837년(헌종3) 식년시에 생원으로 입격하였다. 의병장(義兵將)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이 그의 아들이며 입재에 살았던 기삼연은 성재(省齋)를 당호로 쓰기도 하였다.
* 봉진의……양연(亮衍) : 기양연(奇亮衍, 1831~1911)은 초명이 익연(益衍)이고, 자가 덕수(德水) 호가 사상경수(沙上耕叟)이다. 7촌숙 만진(萬鎭)의 양자로 들어갔다. 옥구 군수(沃溝郡守)를 지냈다.
* 옥류 거사(玉流居士) 이삼만(李三晩) : 1770~1847. 조선 후기 명필로, 본관이 전주(全州). 자가 윤원(允遠), 호가 창암(蒼巖)이다. 만년에 전주 옥류동에 살아 완산(完山) 또는 옥류라는 호도 사용하였다. 오세창(吳世昌)은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고 평하였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 큰 재질을……기다린다 : 원문은 기대(器待)인데 장기대시(藏器待時) 줄임말이다. 이는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가 앞으로 자기가 크게 쓸 물건을 몸에 간직했다가 때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 무슨 이롭지 않은 일이 있겠는가.[君子藏器於身 待時而動 何不利之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최간이(崔簡易) : 최립(崔岦, 1539~1612)으로 간이는 그의 호다. 그는 본관이 통천(通川). 자가 입지(立之)이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에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다. 그 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최립의 글,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시문집인 《간이집》과 시학서(詩學書)인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 두 현인 …… 노래 : 두 현인은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다. 그 노래는 최립(崔岦)의 〈김하서(金河西)가 어려서 문재(文才)가 매우 뛰어났으므로 복재(服齋) 선생이 붓 한 자루를 선사하였다. 이에 그 붓을 상자 속에 잘 보관하고는 자손들에게 전하였는데, 지금 보아도 새 붓과 다름이 없다. 그가 알아줌을 받은 그날의 뜻을 되새기면서, 선생이 큰 화를 당한 뒤에도 어진 덕을 사모한 그 일이 일컬을 만하였고, 또 이를 통해서 복재 선생의 면모를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이렇게 시 한 수를 지어 보았다.[金河西童而甚文用 得服齋先生贈筆一枝 匣而藏之 傳之子若孫 至今如新 夫其服義於受知之日 慕賢於大禍之後 事可稱述 亦足以想見先生之萬一云]〉라는 긴 제목의 시를 이른다. 《簡易集 卷8 還朝錄》
* 복재공(服齋公) : 기준(奇遵, 1492~1521)으로 복재는 그의 호이다. 자가 자경(子敬)이고, 또 다른 호가 덕양(德陽)이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거쳤으며 대간으로 있을 때 훈구파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을 논박하였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재임 중에 기묘사화를 당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1545년(인종1)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낼 때 장성에 살던 소년 김인후에게 붓을 주어 권면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전했다는 붓이 오늘날 필암서원(筆巖書院)에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덕양유고(德陽遺稿)》《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정진의 10대조 기원(奇遠)의 아우이므로 숙조(叔祖)라고 한 것이다.
* 서른에 확고하게 섰다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확고하게 섰으며, 40세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천명을 알았으며, 60세에 이순하였고,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 재린(在麟) : 기재린(奇在麟, 1779~1809)은 자가 인서(麟瑞)다. 생원 태원(泰源)의 아들로 1809년(순조9) 증광시에 진사로 입격하였다. 기정진도 문하에서 배웠다고 하였다. 《蘆沙集 卷28 再從叔進士公行狀》
* 박 정혜공(朴貞惠公) 수량(守良) : 정혜는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의 시호다. 그는 본관이 태인(泰仁)이고, 자가 군수(君遂)이다. 1513년(중종8)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30여년간 내외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우참찬, 경기도관찰사, 호조 판서, 한성부 판윤 등에 이르렀다. 주세붕(周世鵬)과 교유가 깊었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 종조(從祖) 근재공(謹齋公) : 기태검(奇泰儉, 1759~1824)으로 근재는 그의 호이고, 자는 여공(汝恭)이다. 1795년(정조19)에 생원으로 입격하였다. 입재 기재선이 그 아들이다.《蘆沙集 卷28 從祖謹齋公家狀》
* 불대산(佛臺山)의……되므로 : 불대산은 입재가 있는 황룡면 아곡리 하남 마을 동남쪽 장성군 진원면·장성읍과 담양군에 걸쳤는데 오늘날은 불태산(佛台山)이라고 한다. 이 산 남쪽 진원면 고산리에 기정진이 살던 담대헌(澹對軒)이 있다. 그런 까닭에 궁궐의 삼조(三朝) 가운데 가장 바깥쪽 신하들이 집무하는 정문 내 관청을 이르는 외조(外朝)라는 표현을 써서 스승인 입재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담대헌 자리가 오늘날 고산서원(高山書院)이다.
* 가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원문은 긍당긍구(肯堂肯構)인데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고향의 구택(舊宅) : 원문은 상재(桑梓)인데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말한다. 《시경》 〈소반(小弁)〉의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볼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뭐하겠는가.〔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고향의 구택(舊宅) 혹은 고향에 심은 나무를 뜻한다. (이상 기호철)
*** 이 기사는 문화재보호법 이전 그 전초가 될 만한 흔적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이에서 보듯이 재실을 지으면서 그 후손은 선조가 남긴 두건과 신발, 그리고 궤안(几案)은 태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이런 흔적이 도산서원에서도 보이거니와, 퇴계 유물이 전하는 이유다.
문중이 간직한 이런 선조 유물 보존 의식은 문화재보호법 등장과 더불어 중대한 분기를 맞게 된다. 문화재보호법 등장 이전 문화재 보존 흔적들은 내가 꾸준히 자료를 모으려 한다. (台植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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