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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닭대가리 對 뱀대가리, 소꼬리 對 용꼬리

by taeshik.kim 2018.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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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토우 장식 장경호 중 개구리 혹은 두꺼비 뒷다리를 문 뱀..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전국책(戰國策)》이란 중국 고대 문헌이 있다. 제목 그대로 춘추시대에 이은 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무대로 역사에 명멸한 저명한 변사(辯士)들의 활약상을 묶어 정리한 것이다. 진 시황제에 의한 중국 대륙 통일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문헌이 성립한 연대는 진 시황제의 의한 중국 통일 이후가 될 것이며, 늦어도 유방(劉邦)에 의한 한 제국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 초반기 즈음에는 성립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한 고조 유방 때 공신 중 한 사람의 무덤인 마왕퇴 무덤을 발굴조사한 결과 이곳에서 《戰國策》과 大同하고도 小異한 죽간(竹簡) 문헌이 출토된 바 있거니와, 그보다 반세기 가량을 지나서 활동하는 한 무제 때 太史公 사마천만 해도 그의 주저인 《史記》 곳곳에서 이 전국책을 주요한 사료로써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辯士라 해서 무성 영화 시대 나레이터를 연상하지 마라. 유세객(遊說客)이라 해서 세 치 혀로써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한 저명한 유세가들을 말하니, 익히 내가 다른 데서 지적했듯이 이 《전국책》은 그 절반 가량이 합종연횡(合縱連橫)을 주창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라는 두 사람 이야기로 얼룩진다. 그런 까닭에 《전국책》은 소진 장의 열전이라 할 만하다. 


이 《전국책》 중 권 제26 한책(韓策)은 전국 7웅 중 하나인 한(韓)나라와 관련되어 그곳을 주무대로 한 유세객들의 이야기 묶음집이다. 이곳에는 후대에 ‘蘇秦이 楚를 위해 韓王에게 合從을 유세하다’(蘇秦爲楚合從說韓王)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야기가 있다. 소제목을 통한 내용상 이런 분절(分節)은 대체로 죽간이 주된 필기도구의 시대였던 秦漢代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漢代 이후가 되어야 보인다.


서쪽 강대한 秦나라를 주축으로 삼아 정국을 재편하려는 소위 연횡책 장의에 견주어 소진은 그런 강대한 진나라의 독주를 막기 위해 그 동방 6개국, 즉, 남쪽 초나라와 중원 韓·魏· 趙, 동방 齊, 동북방 燕가 힘을 합쳐 대항해야 함을 주창한 소위 합종책 주창자임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이런 맥락에서 당시 秦나라에 할 수 없는 굴종을 감내하고 있던 한왕(韓王)을 찾아가 ‘자주독립’을 설득하게 되니, 바로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저 유명한 ‘닭대가리와 소꼬리’ 비유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태종무열왕릉비 이수 중 용대가리>


유세를 성공케 하기 위해 소진(蘇秦)은 먼저 당시 한나라 군주인 선혜왕(宣惠王), 즉, 선왕(宣王)을 붕 띄우는 전략을 구사한다. 


(한나라는) 국토가 사방 1천 리에 대갑(帶甲)이 수십만이요, 천하의 강궁경노(强弓勁弩)가 모두 한에서 나옵니다. 谿子니 少府니 時力이니 距來와 같은 활은 모두 6백 보 이상을 날아가며, 한나라 군졸이 이를 밟고 당겨 쏘면, 백발이 연속으로 쉼 없이 쏘아져서 멀리는 적의 가슴에 이르고 가까이는 갑옷을 뚫고 심장을 찌를 수 있습니다.


이런 붕 뛰우기 전략을 구사한 다음 소진은 핵심으로 들어간다.


한나라처럼 강한 군대에 대왕처럼 현명한 임금이 서쪽으로 秦나라를 섬겨 스스로 東蕃이라 칭하며 그를 위해 궁실을 짓고 冠帶制度를 받으며, 春秋祭祝의 공물을 바치며 팔을 모으고 굴복하려 하시니 사직에 부끄럽고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는 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소진의 유세는 계속 이어진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선양(宜陽)과 성고(成皐)를 떼어달라 할 것이요, 지금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가는 내년에는 다시 더 많은 땅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계속 들어주다 보면 나중에는 더 이상 줄 땅이 없어질 것이요, 거절하였다가는 이미 들어준 공은 무효가 되고, 오히려 그 화만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무릇 대왕의 땅은 끝이 있지만 진나라의 요구는 한이 없습니다. 유한한 땅으로 무한한 요구를 맞이하다니 이것이 소위 ?시원이매화(市怨而買禍)?(원한을 팔아 화를 사들이다)라는 것입니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땅만 깎이는 꼴이 됩니다.


한왕의 자존심을 건들기 시작한 소진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격분의 말을 치고 나온다.


제가 듣건대 속담에 ‘차라리 닭대가리가 될지언정 소꼬리는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서쪽을 향해 팔을 묶어두고 서쪽의 진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어찌 소꼬리가 되는 꼴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무릇 대왕의 현명함과 한나라의 강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꼬리’라는 이름을 갖는다니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대왕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와 같은 설득 전략은 마침내 주효하게 되니, 소진의 말을 들은 한왕은 이렇게 두 주먹 불끈 쥔다.


한왕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팔을 저어 칼을 만지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었다. 

“과인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진나라는 섬기지는 않겠소. 지금 主君(선생)께서 楚王(趙王의 잘못)의 가르침으로써 조칙을 내려 주시니 공경히 사직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


다음은 위에서 논한 유세 장면 전문이다. 알아서들 감상하기 바라노라.


張儀爲秦連橫說韓王曰: “韓地險惡, 山居, 五穀所生, 非麥而豆; 民之所食, 大抵豆飯藿羹; 一歲不收, 民不饜糟糠; 地方不滿九百里, 無二歲之所食. 料大王之卒, 悉之不過三十萬, 而廝徒負養在其中矣, 爲除守徼亭鄣塞, 見卒不過二十萬而已矣. 秦帶甲百餘萬, 車千乘, 騎萬匹, 虎摯之士, 跿跔科頭, 貫頤奮戟者, 至不可勝計也. 秦馬之良, 戎兵之衆, 探前趹後, 蹄間三尋者, 不可稱數也. 山東之卒, 被甲冒冑以會戰, 秦人捐甲徒裎以趨敵, 左挈人頭, 右挾生虜. 夫秦卒之與山東之卒也, 猶孟賁之與怯夫也; 以重力相壓, 猶烏獲之與嬰兒也. 夫戰孟賁‧烏獲之士, 以攻不服之弱國, 無以異於墮千鈞之, 集於鳥卵之上, 必無幸矣. 諸侯不料兵之弱, 食之寡, 而聽從人之甘言好辭, 比周以相飾也, 皆言曰: ‘聽吾計則可以强霸天下.’ 夫不顧社稷之長利, 而聽須臾之說, 詿誤人主者, 無過於此者矣. 大王不事秦, 秦下甲據宜陽, 斷絶韓之上地; 東取成皐‧宜陽, 則鴻臺之宮, 桑林之苑, 非王之有已. 夫塞成皐, 絶上地, 則王之國分矣. 先事秦則安矣, 不事秦則危矣. 夫造禍而求福, 計淺而怨深, 逆秦而順楚, 雖欲無亡, 不可得也. 故爲大王計, 莫如事秦. 秦之所欲, 莫如弱楚, 而能弱楚者莫如韓. 非以韓能强於楚也, 其地勢然也. 今王西面而事秦以攻楚, [爲敝邑], 秦王必喜. 夫攻楚而私其地, 轉禍而說秦, 計無便於此者也. 是故秦王使使臣獻書大王御史, 須以決事.” 韓王曰: “客幸而敎之, 請比郡縣, 築帝宮, 祠春秋, 稱東藩, 效宜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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