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느낌이 있어서[感遇]
[조선] 허봉(許篈·1551~1588)
전남 장성 고경명 묘소에서
낭군은 둑가 버들 좋아하셨고
소첩은 고개 위 솔 좋았어요
바람 따라 홀연히 흩날리며
이리저리 쓸려가는 저 버들개지
겨울엔 그 자태 변하지 않는
늘 푸른 솔과 같지 않지요
좋아함과 싫어함 늘 변하기에
걱정스런 마음만 가득하답니다
君好堤邊柳, 妾好嶺頭松. 柳絮忽飄蕩, 隨風無定蹤. 不如歲寒姿, 靑靑傲窮冬. 好惡苦不定, 憂心徒忡忡.
전남 장성 고경면 묘소에서
조선후기 문사 한치윤(韓致奫·1765~1814)이 《열조시집(列朝詩集)》에서 채록했다면서, 그의 《해동역사(海東繹史)》 권제49 예문지(藝文志) 8 본국시(本國詩) 3 본조(本朝) 하(下)에 위 시를 수록하면서, 《열조시집》을 인용해 이르기를 “허봉(許篈)의 여동생이 김성립(金成立)한테 시집갔는데, 착했지만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시를 지었다”고 했다. 허봉은 허균(許筠·1569~1618)의 형이요, 난설헌(1563~1589)의 오빠다. 따라서 김성립한테 시집간 여동생이란 곧 허난설헌을 말한다.
한시 제목에 흔히 등장하고, 이 시에서도 제목으로 삼은 감우(感遇)란 우연히 생각난 바를 읊었을 때 쓰는 말로써, 이것도 저것도 붙이기 싫을 때는 무제(無題)라 하기도 한다. 시를 보면, 허봉은 여자에 가탁해 바람기 다분한 한 남자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 바라기의 심정을 나무에 견주어 그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으니, 남자는 봄날만 되면, 이리저리 그 꽃방울 날리는 버들개지맹키로,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에 견주어, 화자인 여자는 같은 자리 높은 산 꼭대기를 홀로 지키는 소나무에 비긴다. 이를 무슨 전통시대 유교 윤리를 끌어다가 설명하기도 하는 모양이나, 글쎄, 그것이 꼭 전통시대 유교윤리만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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