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신라 사람이나, 642년 대야성 전투 때 신라를 배반하고 검일과 더불어 백제와 내통해 성이 백제에 함락되도록 하고, 아울러 이때문에 대야성주 김품석 부부를 죽임에 이르게 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 정벌 때 신라군에 잡혀 처형됐다. 그의 가족들은 절 노비로 적몰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본기 : 7년(660)…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했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한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로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게끔 했으므로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공(法空) :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 그 뒤 태종왕(太宗王) 때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佛法)을 믿어 화보(花寶)와 련보(蓮寶) 두 딸을 바쳐 이 절의 종으로 삼았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으니 이 두 가족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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