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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문화재는 개발 방탄막이가 아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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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공평동 재건축 발굴현장>


시대가 변했다. 문화재도 변했다. 종래 문화재라고 하면 일방적인 타도 대상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이런 문화재의 속성, 혹은 이미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하며 강고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화재는 그 존재기반으로 삼는 관련 법률이 문화재보호법이며, 근자에는 그것이 더욱 분화해 매장법과 수리기술자법, 고도보존법 등으로 분화하고, 나아가 얼마 뒤면 무형유산법과 세계유산법도 제정될 것이어니와, 이들은 그 속성이 규제법이라는 점이니 이들 법률이 규제성을 포기하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규제법이라는 무엇인가? 이에서 규제 대상은 무엇인가? 이르노니 개발로부터의 막음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가 개발과의 대척점을 형성한다는 믿음 혹은 실감은 현실과 다르다 할 수 없다. 


이런 규제가 종래에는 걸림돌 일방으로 간주됐지만 근자에는 그런 규제에 착목해 이를 역이용하는 노골적인 흐름도 등장했으니, 다름이 아니라 개발로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발과 혜택과 정반대하는 흐름이 위치하는 세력이 문화재가 탑재한 규제라는 무기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인가? 문화재를 이용해 개발 자체를 원천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근자에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중인 사례를 보자. 


세계유산 조선왕릉 일부를 구성하는 정릉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이 묻힌 곳이거니와 이곳은 사적에다가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한데 그 주변 일대에 대한 재개발 움직임이 있었다. 이 움직임이 현재까지는 좌절한 상태다. 인근에 모 사찰이 있어 정릉 원찰을 표방한 이 사찰이 이 개발을 반대한 것이다. 이유는 그럴 듯하다. 개발로부터 정릉을 보호하자는 것이었지만 내실을 보면 사찰의 이해와 관계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 사례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개발계획이 포기된 일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 이유도 나중에 말하고자 한다. 


<청주 호암택지개발지구 조선시대 기와가마>


강남구 세곡동 보금자리주택. SH공사가 추진하는 이 사업 뜻밖에도 인근 주민 상당수가 반대했다. 그 주된 이유는 강남 하면 떠오르는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와 썩 무관치도 않아, 그 자세한 내막은 말하지 않으련다. 한데 이들이 내세운 논리가 문화재 보호였다. 무턱대고 개발을 반대할 명분이 없으니 문화재보호를 이유로 반대했다. 


용유담. 이것도 근자 논란이 됐다. 댐에 수몰될 위기에 처한 이곳을 보호하자는 측에서는 이것이 명승이 될 만하다고 주장했다. 댐 건설을 반대하는 방탄막이로서 명승이라는 문화재 개념이 동원된 것이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이 역시 막고자 하는 측에서는 문화재를 주목해 문화재를 내세워 해군기지에 맞짱을 뜨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개발이라는 괴물을 막는 마지막 첨병으로 호명한 이가 바로 문화재였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는 점점 문화재가 개발을 막는 총알받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심히 우려한다. 총알받이 문화재. 이거 말이 그럴 듯하다. 개발이라는 괴물을 문화재가 막는다는데 어찌 대단하지 않으리오? 하지만 내실을 들여다 보면 문화재에 의한, 문화재를 위한, 문화재의 보호보존 논리는 실종하고 오로지 개발을 막는다는 무기로서의 문화재가 있는 일이 허다하다. 


나는 문화재가 언제나 개발과 대치하는 국면을 증오한다. 개발과 궤를 맞추어 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유엔이 표방하는 정신을 빌린다면 지속가능한 개발 혹은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다. 우리 역시 지향해 할 방향 중 하나가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나는 본다. 하지만 방탄막이 문화재를 development와 언제나 적대점으로 형성하면서, 그것이 결국 문화재에 대한 혐오를 더욱 키우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는 마약과도 같다. 마약. 당장은 약효를 보지만 장기로는 패악이다. 마약은 종국에는 철퇴를 맞는다. 문화재가 부디 뽕쟁이를 살리는 마약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다음은 네 페이스북 계정에 September 7, 2016 at 8:44 AM에 게재한 같은 논조 글이다.  


《총탄막이로서의 문화재, 그 드라마틱한 변화》


강남 세곡동 일대에 임대주택이 들어설 무렵이었다. 재개발 예정지는 나중에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지금은 아마 아파트가 서 있을 것이다. 한데 그 개발이 추진되는 와중에 인근 주민대표들들이 당시 문화재 담당 기자인 나를 찾아왔다. 이른바 좀 있는 사람들이다. 그네들 이야기인즉, 세곡동 임대주택 개발 계획을 막아달란 얘기였다. 이야기인즉, 이곳에는 문화재가 많으니 개발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다녀간 뒤 다른 곳에 알아보니, 임대주택이 들어오면 인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함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네들이 그 개발을 막고자 마지막으로 찾아낸 것이 문화재였다. 그때 내가 드뎌 실감했다. "아, 시대가 변했다. 문화재가 방패막으로 나서는 시대가 되었구나."


비슷한 시기.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다 나가 떨어지고 마지막에 오직 문화재만이 남았다. 난 문화재가 그리 힘이 있는 방패막이가 되는 줄 미쳐 몰랐다. 


다시 비슷한 시기. 사대강 사업이 논란이었다. 그것을 막고자 하는 방패막이 최전선에 문화재가 동원되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보다 좀 이른 시기. 등록문화재가 도입된 초창기였다. 지금은 제도도 바뀌고, 지원 방안도 좀 보강되었지만 초창기에는 그러지 않아 등록은 말 그대로 등록일 뿐이라, 소유주 꼴리는대로였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때라, 등록문화재라고 하니, 예고된 그날 소유주는 포크레인 동원해서 그 건물을 부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해안 소금창고는 일거에 사라졌고, 명동 어느 건물도 폭삭 폭파됐다.


이 등록문화재 초창기 시대가 내가 보는 문화재에 대한 반항의 마지막 발악시기다. 이후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 급속도로 방패막이로 나서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투자대상으로 변했다. 여전히 문화재를 향한 저항이 만만치는 않으나, 전국에 걸쳐 이곳저곳 문화재 못만들어 환장하는 시대에 돌입했다. 내가 정확한 통계치는 없지만 지금 문화재위에 사적 지정해달라고 올라온 건수가 300건이 넘는다고 안다.


격세지감이다. 문화재라는 말만 들어도 도망가던 시대가 불과 엇그제인데 이제는 너도 나도 문화재 만들어달라 아우성인 시대다. 


왜인가? 문화재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그에 덩달아 조금은 제도와 지원 방안도 좀 바뀌었기 때문이다.


설악산? 

이거 세계유산 만들겠다 했더니 안 된다 데모하고 난리 친 게 1995년 1996년이다. 요새는 세계유산 못 만들어 환장한다.


부여 공주 익산은 세계유산되고 나서 지금 혁명이 일어났다. 그 주변 가봐라. 작년에 알던 그 부여 공주 익산은 선캄브리아 후기로 벌써 사라지고 없다. 천지개벽이다.


문화재가 돈이 되는 시대다. 나아가 문화재 지정되기만 하면 소유주는 손도 안대고 코푸는 시대가 돌입했다. 이걸 이미 민감하게 알던 곳이 불교계가 대표하는 종교집단과 문중집단이었다. 이들은 이미 알았다. 문화재로 지정되기만 하면 불사 국가 돈으로 하고 문중 일 국가돈으로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자체 역시 마찬가지라. 일단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면 중앙정부 7, 지방정부 3 비율로 부담하되, 다시 지방정부 부담률은 광역자치단체 5, 기초자치단체 5 비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돈 거의 안들어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내가 잊어먹기 전에 내 시대에 일어난 문화재의 드라마틱한 변모를 기록해둔다. 그렇다고 내가 저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거나 아니면 긍정으로 바라본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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