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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는 박가분이라는 화장품 광고가 나온다.
이 박가분을 제조판매한 이는 박승직이라는 사람인데 두산그룹의 창업주, 바로 그 사람이다.
1920년대 초반만 해도 신문 광고는 태반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미국, 유럽 수입품 아니면 일본 공산품이 대부분이라
한국에서 제조된 상품 광고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 면에서 박가분은 우리나라 화장품 광고의 효시라 할 만 한데 불행히도 이 안에는 납이 들어 있어 나중에 큰 물의를 빚었다.
두산 그룹은 이 박가분으로 시작하여 기업을 일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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