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268)
설날[元旦]
[明] 구월(區越, 1468~1535) / 김영문 選譯評
김천 수도암 대적광전
동풍이 어제 밤
당도하여
기쁨을 성안으로
보내주네
그대 봄볕 힘에
의지하여
천호만호 대문이
활짝 열리네
東風昨夜到, 送喜入城來. 仗爾春陽力, 千門萬戶開.
김천 직지사 대웅전
지금은 음력 기해년(己亥年) 정월 초하루 2시가 넘었다. 이미 설날이 되었고 아직도 수세(守歲)하며 불을 환하게 밝힌 분이 많으리라. 수세는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삼시충(三尸蟲)이 우리가 잠든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 1년 동안 저지른 죄를 상제(上帝)에게 낱낱이 고해바쳐 그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고 밤을 꼬박 지켜야 한다는 풍속이다. 흥미롭게도 내가 자란 시골에는 섣달 그믐날에 이런 풍속이 있는 게 아니라, 정월대보름 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고 했다.
어릴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나는 소위 설날 명절증후군을 겪었다. 선친께서 가문의 문장(門長)이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거의 모두 우리 집으로 설날 세배를 왔다. 초등학교 입학한 이후부터는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아버지 곁에서 새배온 분들에게 세배를 올리며 술잔을 따라 드려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설날에 아버지를 시봉(侍奉)하는 풍속임을 알았다.
내 또래 친구들은 모두 밖에서 때때옷 입고 놀기 바쁜데 설날 하루 종일 사랑방 아버지 곁에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시라. 요즘 같으면 찾아온 분들에게 세배하면 세뱃돈이라도 얼마씩 주겠지만, 내 어릴 때는 세뱃돈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저 건강하고 공부 잘 하라는 덕담에 그쳤다. 이 때문에 설날이 다가오면 어린 마음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또 집집마다 세배를 다녀야 했다. 그때는 술을 좀 마실 줄 아는 나이여서 한 집에 한 잔 씩만 마셔도 저녁 때가 되면 술이 취하기 일쑤였다. 마지막 집에 세배를 올릴 때쯤이면 절을 하다 코를 박고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모두 일가친척이거나 이웃사촌들이어서 모두 흉허물 없이 웃어넘기곤 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또 고향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거하게 술판을 벌였다. 지금은 이미 사라진 풍경이다. 고향 어르신들은 거의 돌아가셨거나 70~80을 넘겼을 뿐 아니라, 대부분 도시로 역귀성을 하는 시절이니 어느 시골 할 것 없이 적막강산으로 변한지 오래다.
요즘은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바뀌어서 대개 남녀 구분 없이 명절 음식 준비에 참여한다. 우리 집도 집안 작은 종가지만 나와 동생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음식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집안 어르신께 먼저 세배를 올린 후 차례를 지낸다.
다른 집안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는 설날 제사를 약식으로 지낸다. 메와 갱을 올리지 않고 떡국으로 대신하며, 절을 올릴 때도 삼헌을 하지 않고 제주(祭主) 단헌으로 끝낸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정식 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날이 되면 흔히 절을 어떻게 해야 하나, 차례를 어떻게 올려야 하나 등등을 따지며 전통예법을 들먹이다. 하지만 설날은 새해의 시작이다. 설날 축하 문구도 ‘근하신년(謹賀新年)’과 ‘송구영신(送舊迎新)’이 대표적이다. 즉 낡은 것이 아니라 새것에 중심이 있다.
김천 직지사
전통은 항상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새 전통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새해의 ‘새’와 신년의 ‘신’의 의미를 음미하는 설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위의 시에서 읊은 것처럼 새로 살아오는 봄볕에 의지하여 천만호의 대문이 활짝 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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