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삼국사를 논할 때 모두가 동국통감을 읽었다 했거니와,
그런 까닭에 신라사를 논할 적에 이 사금갑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그네들 모두가 내전분수승과 불륜하다 들켜서 복주된 비처왕 곧 소지왕의 여인을 왕비로 보았지, 후궁 중 한 명인 궁주宮主로 보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에서는 궁주라 했지만,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는 아예 왕비로 못을 박은 까닭이다.
나아가 이 사건이 발생한 날짜가 삼국유사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정월 15일로 이해한 것 또한 절요와 통감에서 비롯한다는 말을 했다.
조선후기 안정복이 동사강목이라는 대작을 기획하면서 소지왕 10년, 서기 488년을 기술하면서 아예 저 사건으로 복주된 여인이 당시 소지왕비 선혜善兮라고 못을 박은 까닭이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왜 이랬는가 하면, 당시 소지왕비는 이벌찬伊伐湌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논란을 부르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소지왕비로 선혜를 거론했지마는,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전연 다른 인물, 곧 실명은 밝히지 아니하면서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들이 있었다.
가장 간단한 이해는 선혜와 기보갈문왕의 딸을 같은 사람으로 보는 방법이 있다.
실제 이런 식으로 설명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일찍이 썼듯이 전연 다른 사람이다.
간단하다.
소지왕한테는 두 명 혹은 그 이상 되는 왕비가 있었고, 사금갑 사건 당시에는 선혜가 왕비였을 뿐이다.
철저한 일부일처제인 신라에 왕이라 해서 동시기에 정식 부인이 둘이 있을 수는 없다.
간단하다.
선혜와 기보갈문왕 딸은 다른 시기 각각 소지왕비였을 뿐이다.
이는 화랑세기를 보면 명백하다.
화랑세기와 그 자매 족도 이른바 상장돈장을 보면 소지왕은 재위 기간에 왕비가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즉위 시점에 왕비가 죽자, 재위 2년인가에 새로운 왕비를 들이고, 그러자가 그가 다시 죽자 8년에 세 번째 왕비를 들이니 선혜다.
이 간단한 이해가 화랑세기 출현 이전에는 불가능했다.
근자 화랑세기를 부정하는 어느 논자가 쓴 어떤 논문을 보니 가관이라,
저 소지왕비를 둘러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착란을 해설하기를 소지왕한테 왕비가 둘이었다는 근거로 들었거니와,
이 꼴이 얼마나 웃긴가 하면 그것이 바로 화랑세기 논술인 까닭이다.
화랑세기를 보면 실제로 기보갈문왕 딸과 선혜 둘 다 소지왕비였다.
화랑세기를 부정하면서 지가 쓴 논문은 화랑세기 그대로니 이 꼴을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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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5) 정월 15일은 절요와 통감 논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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