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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새사랑 찾아 야반도주한 작제건 마누라 저민의

얼마전 북한이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개성에 소재하는 고려 온혜릉이라는 고려 태조 왕건의 할매 무덤인 온혜릉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타전했거니와, 그 소식을 인용하면서 나는 대체 그의 할매 무덤이라니? 더구나 그 할매 무덤을 온혜릉이라고 한다는 근거가 무엇인지 심대한 의문을 표시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혹은 제왕운기, 혹은 기타 우수마발 고려시대 고려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 어떤 그 조모 무덤 관련 흔적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온혜릉이란 어느날 느닷없이 출현한 귀신인가? 


왕건 할머니는 이런 인어 종류였을 것이다. 코펜하겐 인어상. 연합DB



그런 의문 제기에 전라도 장성땅 행주기씨 호철 선생이 관련 문헌 기록을 디립다 긁어다 주었거니와, 보니 온혜릉이란 溫鞋陵이라 쓰고, 그것이 태조 왕건의 조모, 그러니깐 작제건作帝建하고 쿵쿵딱해서 장자 륭隆을 비롯한 네 아들을 둔 그 용왕 딸을 묻은 곳을 온혜릉이라 한다는 전설이 조선시대 송도지방 지리지에 집중으로 등장함을 알았다. 

 

예컨대 《여지도서輿地圖書》 〈松都誌 卷3 陵墓〉에 이르기를 "고려 온혜릉(溫鞋陵)-광명동(廣明洞)에 있다.- 전설에 전하기를 용녀(龍女)가 서해로 돌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남긴 신발만으로 장사 지냈으므로 온혜릉이라고 부른다. [高麗溫鞋陵 在廣明洞 俗傳龍女還西海不返故只葬所遺之鞋因稱溫鞋陵]"라 한 것이 그 증좌 중 하나다. 


혜鞋란 신발을 말하거니와, 개중에서도 가죽을 의미하는 革이 부수자인 데서 엿보듯이 주로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이리 일컫거니와,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을 열어보니,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신발 혹은 지팡이만 덜렁 남았더라는 전설은 말할 것도 없이 도교에서 차용하는 신선들의 승선담昇仙談이어니와, 왕건 조모 무덤을 굳이 이 글자를 집어넣은 깓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신이성神異性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설혹 왕건 조모 무덤이 있다 해도, 애초 이름은 온릉溫陵일 것이다. 


비단 이 《여지도서輿地圖書》 외에도 개성 광명동에 온혜릉이 있고, 그것이 왕건 조모 무덤이라는 전설은 현재까지 남은 형적을 고려할 때 고려 후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해 급속도로 퍼진 것으로 보이어니와, 다만 그 근거는 박약하기 짝이 없어, 벌써  저 《여지도서輿地圖書》만 해도 그 근거를 찾이 못해 출처를 속전俗傳이라 적었을 뿐이다. 


《고려사》가 저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는 고려 건국신화 일종이지만, 실은 왕건의 선대들에 얽힌 신이담이라, 그에 의하면 다문화 가정 소산인 작제건은 어떤 늙은 영감탱이를 알게 되고,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그 영감탱이 맏딸 저민의翥旻義라는 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송악에 정착해서는 알콩달콩 살면서 새끼를 많이 깠다고 한다. 


왕건 할머니는 이런 인어 종류였을 것이다. 코펜하겐 인어상. 연합DB



한데 이 영감탱이가 용왕이라, 그런 까닭에 작제건 마누라 저민의는 인어공주 용녀龍女라, 용은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까닭에 밤마다 이 물고기 공주는 우물과 바다를 오가며 덤벙질을 해댔으니, 고려세계에는 이 대목을 일컫기를 


용녀가 일찍이 송악松嶽의 새 집 침실의 창 밖에 우물을 파고 우물 속으로부터 서해西海의 용궁龍宮을 오갔는데 바로 광명사廣明寺의 동상방東上房 북쪽 우물이다. 늘 〈용녀는〉 작제건作帝建과 더불어 다짐하기를, ‘제가 용궁으로 돌아갈 때 삼가 엿보지 마십시오. 어긴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작제건이 몰래 엿보았더니 용녀는 어린 딸과 더불어 우물에 들어가 함께 황룡黃龍으로 변해 오색구름을 일으켰다. 〈작제건이〉 기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용녀가 돌아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신의를 지킴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제 이미 다짐을 저버렸으니 저는 여기에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어린 딸과 더불어 다시 용으로 변해 우물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만년에 속리산俗離山의 장갑사長岬寺에 살며 늘 불교 경전을 읽다가 죽었다. 후에 추존하여 의조 경강대왕(懿祖 景康大王)이라 하고 용녀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다.


고 했거니와, 속이 좁아터져서는 보지 말라는 거 봤다 해서 삐져서 도망가는 마누래는 제정신인가? 남편된 자가 뭘 좀 볼 수도 있지, 그걸 봤다가 저리 벌컥하고는 이혼장 집어던지면 쓰겠는가 말이다. 


암튼 이에 의하면, 작제건 마누라는 삐져서 집을 나간 다음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신발을 남기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 넷은 남기고 떠난 듯하다. 아들이 넷이라 다 데리고 갈 수 없어, 혹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휑하니 떠나고 만 것이다. 


나는 저민의가 바람이 났다고 본다. 바람 나서 도망친 것이다. 더구나 그 행색을 보건대 뱃사람이라, 뭐 이래저래 만난 새로운 인연, 나 새로운 사람이랑 잘 살래 니는 여서 혼자 살아레이 하면서 냅다 야반도주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야반도주를 저런 식으로 사기를 쳤으니, 하긴 뭐 그래야 있어 보이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