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조선시대 미라

서울 사대문 안 지하의 비밀 (7)

by 초야잠필 2019. 1. 10.
반응형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에서 서울 시내에 홍수가 잦았으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가 하면 장마피해로 종각의 종이 토사로 한길 정도 묻힐 정도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한양성의 홍수피해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기호철, 배재훈 선생이 찾아 낸 당시 기록의 편린을 가지고 지도에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그림에서 A, B, C, D는 우리가 기생충 샘플링을 해서 조선시대 지층에서 기생충란을 확인한 지역이다. 

빨간색 선은 청계천과 그 지류이다. 노란색 화살표는 청계천 본류를 가리킨다. 

보라색 부분은 성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사서에서 확인 가능한 지역들이다. 경복궁과 경희궁이 포함되어 있다. 

기타 노란색 동그라미 부분은 사서에서 홍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구역들이다.



위 지도를 보면 청계천과 그 지류 상당 부분이 홍수 때 자주 피해를 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우선 H는 종각인데 전 회에서 보신각종이 조선시대에 상당히 많은 양의 토사에 묻혀 있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이는 반복된 홍수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바로 지척에 있는 의금부 (G) 예를 보자. 승정원일기 효종 1년 7월 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以義禁府言啓曰, 本府坐地卑下, 今日之雨, 庭潦沒膝, 至於浸入獄間, 累次頹圮, 實由於此。若不及時開渠引流, 則前頭之患, 尤有甚焉, 而其所修渠處, 陻塞甚遠, 非若干人夫所可就役。依壬午年例, 令該曹到防軍累百名, 臨時定送, 以爲一日之役宜當, 敢啓。傳曰, 知道。


간단히 풀어보면 폭우로 인한 홍수 때문에 의금부가 본래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당일 내린 비로 수몰되어 죄수를 수감한 옥까지 물이 들 정도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개천이 막힌곳을 뚫지 않으면 해결이 어려운데 이를 시도하려 해도 사람 몇 명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의금부는 종각 바로 지척에 있다. 그런데 의금부도 이리 심한 홍수를 당한 것을 보면 영조 때 종각 종이 토사에 묻혀 있었다는 기술도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의금부터에 세워 놓은 표지석




의금부와 종각이 이처럼 홍수 피해를 본 까닭은 아마도 그 남쪽 청계천이 넘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그래도 청계천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종각과 의금부가 이처럼 수몰되었다면 그 사이에 있던 지역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청계천 (L, K)은 동쪽으로 흘러가면 동대문 근처 오간수문 (I)에 닿게 되는데 이곳 상황은 어떠했길래 자주 물이 넘쳤을까. 먼저 오간수문 자체가 토사에 의해 막혀 물이 쉽게 흘러내려갈수 없는 상황이었음은 지난 회 영조와 홍봉한의 대화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홍봉한이 이르기를, “수구문도 메워져 물이 청량교(靑梁橋)로 빠져나가지 못하니, 고인이 된 참판 이중협(李重協)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오간수문에 시신이 걸려 건져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대문 근처에 남아 있는 오간수문. 영조가 준천하기 전에는 토사가 쌓여 제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청계천에 물이 불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빠지지 못하고 개천 다리위로 물이 흘러 지나가고 이는 하류인 동대문 쪽으로 갈수록 더 심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上曰, 看審川渠則何如耶? 汝皆陳之。允鈺曰, 見資始宮橋, 則水過橋上, 而別無穿破之慮。至治鑄街, 則人家堅緻, 亦無侵破之患, 見松皮廛橋, 則亦皆水過其上矣。上曰, 是三間石橋耶? 允鈺曰, 卽三間石橋也。上曰, 有漂流人耶? 允鈺曰, 無之矣。見細經橋, 則略干穿破矣。向來駕幸彰義宮時, 石築處有下詢者矣, 其石築不壞矣。至毛廛橋, 則水順下而不泛濫矣。至廣沖橋下, 或有人家浸漬者矣。至孝經橋, 則水過其上, 馬廛橋亦如是, 而大抵水勢漸盛矣。至二間水口, 則與五間水口, 水勢相連矣。臣到其處, 則御將已到矣。(승정원일기 1107책 (탈초본 61책) 영조 30년 5월 17일 을미 19/19 기사) 



2019년 현재 청계천은 물이 흐르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평소에는 거의 물이 흐르지 않다시피 하다가 비만 내리면 홍수가 지는 다루기 난처한 존재였을 것이다.


청계천이 사대문 안으로 부터 빠져 나가는 오간수문-동대문 주변 상황은 다음 사료가 잘 말해준다. 역시 영조대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내용이다. 


興仁門今番則當祭於門下, 東門低陷, 而雨勢如此, 似有水浸之患矣。在魯曰, 自上雖未詳知, 臣常於往來出入時熟見之, 霖雨時則流潦溱蓄, 往來行人, 出入於水中矣。上曰, 雖大段水浸, 諉以朝家之申飭, 不避水浸, 仍以行祭, 則是可慮也。在魯曰, 東大門水浸, 本來如此, 不可不變通


풀어보면, 동대문 일대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상습 침수 지역인데 한번 장마철 홍수가 졌다 하면 물이 고여 사람들이 그 속으로 지나다녀야 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침수가 되어 버린 것도 다름 아닌 청계천 하상이 높아지고 오간수문이 토사로 막힌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청계천 변을 따라 동대문까지 이르는 지역은 토사가 개천 흐름을 방해하여 비만 오면 넘친 빗물이 주변 민가와 관공서를 침수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동대문 인근은 저지대로 조선시대에 상습침수지역이었다. 사실 오늘날의 동대문 지형을 보면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긴 하다. 



사대문 안에서 홍수 피해는 청계천 변에 인접한 지역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사대문 안에는 왕실 채소밭을 관리하던 사포서(司圃署)라는 기관이 있었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본사 자리가 그곳인데, 청계천 본류와는 상당한 거리인데도 (위 지도 참조. R로 표시되어 있음) 정작 홍수가 나면 수해를 당할까봐 아래와 같이 이를 염려하는 계를 올렸다. 아래 글을 보면 창의동 역시 홍수에서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다. 


本署之疲弊, 在各司爲最, 至於官廨, 亦甚窄小雖容, 且在彰義洞深僻處, 前有川渠, 故若値潦雨, 則或有阻水之患 


그렇다면 한성부 북쪽, 경복궁과 육조거리 근처는 어떨까? 일단 육조거리 자체의 홍수에 대한 기록은 내가 아는 한 많지 않다 (이점 유감이다). 


그리고 경복궁 주변은 홍수를 시사하는 기록이 있다 해도 청계천 주변보다는 훨씬 소략하고 단정적이지도 않다. 이런 점이 경복궁과 육조거리에는 상대적으로 홍수가 적었음을 의미할까? 이 점은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을 엿보는 단편적 기록이 부족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복궁 동쪽을 보자. 여기는 이 지역을 흐르는 개천 (아마도 중학천; 위 지도의 S 와 T) 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승정원일기 효종 9년 9월 24일조)


景福東城外大川兩處, 平時築石, 以防漲潦, 經亂後六十餘年, 其所築之石, 盡歸偸失, 每年潦水浸破,....  年年水患, 誠爲可憫.... , 


경복궁 궁성 동쪽을 흐르는 큰 개천 양쪽에는 원래 석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지고 매년 홍수피해가 있다는 것이다. 


경복궁 서쪽의 장동 지역 (Q)이 어떤 식으로 홍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9일조다.  


洪啓禧曰, 以景福宮內田傍水道事, 依下敎遣郞廳摘奸, 則西水口, 及禁川橋南水口, 皆太半堙塞, 以起耕之故, 水道甚狹少, 有霖潦則水必泛濫, 爲害於壯洞居民云, 不可不自本所用役夫疏鑿, 以除民弊矣


풀어 보면 경복궁 수구 (서수구 및 금천교 남수구)가 막혀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으니 홍수가 지면 물이 범람하여 주변 장동 지역 사람들에게 그 피해가 가므로 이를 준천해서 뚫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보듯이 경복궁 주변 수구가 막히고 홍수가 나는 원인의 하나로 영조와 신하들은 불법적으로 궁궐 주변에서 짓는 밭농사를 지목한다. 


경복궁 주변에서 토사로 막힌 물길과 홍수 그리고 준천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는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다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승정원일기 영조대 기록에 한번 더 나온다 (아래 참조). 


啓禧奉上地圖, 仍進曰, 大隱巖水漲, 則入於毓祥宮前路, 仍過於中學橋矣。鳳漢曰, 鮒魚橋水道全塞, 蓋以橋邊左右家, 有此塡塞矣。上曰, 兵曹參知入侍。參知洪樂性進伏。上臨禁川橋上, 下敎曰, 初不知如此塡塞矣。樂性曰, 宣仁門內, 尤甚矣。...(중략)... 鳳漢曰, 臣有區區所懷敢奏矣。於矣洞本宮南墻外, 全爲菜田, 此可寒心城中片土, 似不得起耕, 然後當有益於水道,... (중략).... 上曰, 龍興舊宮近處, 皆爲士夫家菜田, 寒心矣。...(중략)... 本宮南墻, 古則人家稠密, 今則便成菜田, 龍興舊宮, 若在野村, 尋常寒心。


결국 준천이고 뭐고는 불법적으로 짓는 채소밭을 근절하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군기시 터의 청계천 물길. 여기서도 기생충란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제일 위 그림의 대략 "E" 부분, 경복궁이 무너진 옛터에 불법적으로 농사짓는 밭이 아주 넓게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 밭 때문에 주변 경복궁 주변 수구가 막히고 물이 제대로 흐르지 않아 비만 오면 인근에 홍수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육조거리 기생충란은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 황폐화해 있던 땅에서 불법적으로 짓던 밭농사와 어쩌면 관련이 깊을 수 있겠는데 이 점은 앞으로 더 천착해야 하는 부분으로 지금 결론 내리기는 이른 감이 있다. 아직은 단지 내 상상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현상-홍수와 반복적 침수-는 사대문 안 지역에서 영조대 준설이 시행된 후 크게 경감되었다고 안다. 


영조가 청계천 준천이 끝난후 남긴 글. 준천 공사가 마무리 된것은 경들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찌기 듣기를 후한 광무제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것인가)-. 오간수교 아래에 영조의 휘호를 옮겨 놓았다.


하지만 적어도 준설이 시행되기 전에는 조선 건국 초와 비교하여 청계천 하상은 크게 높아져 있었고 이 때문에 당시 한성부 내 홍수가 빈발하여 인가가 표몰하고 오수가 사대문 안 곳곳을 휩쓸었다고 본다. 


밭에 거름 형태로, 혹은 변소에 오물로 담긴 분변은 이러한 홍수 와중에 정상적으로는 존재할수 없는 곳까지 퍼져 나갔고 그 안에 섞인 기생충란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수백년을 지나 우리가 시행한 기생충학적 검사에서 확인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본 서울 사대문 안 지하의 비밀, 기생충란이 육조거리까지 덮어 발견된 이유라고 짐작한다. (계속)


# 다음 회에 이번 연재에 대한 간략 한 소회와 몇가지 정보를 공유하면서 글쓰기를 마무리 할까 합니다. 


## 아마 이번 연재 후부터는 연재 주기에 대해 약간 조정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연재하는 날짜를 고정시키고 하루나 이틀 정도 간격을 두고자 합니다. 저도 생업이 있는 사람이라.. 양해 바랍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