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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신석기시대 화전론에 대한 해외의 시각

by 초야잠필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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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선 이미 소로 쟁기를 끄는 농법이 있었다. 저 농법이 훗날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지금은 불확실하지만 그대로 한반도로 침투한다. 쟁기 봐라. 똑같지 아니한가? 이를 어찌 심상히 넘기겠는가? 실크로드? 고고학은 그런 한가한 놀음 일삼을 때가 아니라, 이집트발 저 소 쟁기질을 봐야 한다. [이상 사진 및 설명 편집자 보탬]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필자가 이 블로그에 쓴 신석기시대 화전론은 필자가 처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온라인만 찾아 봐도 필자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를 들자면,
 

A. The results of the experimental slash-and-burn demonstrate that permanent cultivation was not possible without additional organic matter inputs. Therefore, agriculture in the Neolithic could have been maintained by slash-and-burn of new areas of the forest, or by the addition of organic matter to previously burned fields.


B. The work input and risk of crop failure with the slash-and-burn practice is low, when compared to other agricultural systems. A disadvantage is the demand of space: to burn a certain area requires the fourfold area for the supply of small wood. After one cultivation period, a long-term fallow (ca. 12 years) is mandatory before cultivation can restart.


C. According to older opinions, Neolithic agriculture was rather simple and hadn’t developed sophisticated methods of manuring and tillage. Therefore people had to shift their fields regularly to avoid bad harvests (Childe 1929, 1952, 1960, Sangmeister 1950).


D. But on the authority of later research the fertile soils of the loess belt in Central Europe, colonized during the Early Neolithic of Central Europe (about 5600 to 4300 B.C. cal.), allowed adequate yields for many years without manuring. Adequate yields in this case mean between five and eight dt/ha, as calculated for the Early Modern age three-field-system. Based on those yields are also quantitative models of Neolithic agriculture and nutrition (Jacomet and Schibler, 1985). For these reasons permanent fields and settlements were postulated (Modderman 1971, Lüning 1980 a, b). Neolithic agriculture was different from recent shifting cultivation in the tropics and also different from early modern age slash-and-burn agriculture on poor soils in mountains.

 
결론이다. 

1. 한국의 신석기시대에는 잡곡농경이 주류였다. 수렵채집의 시대가 아니었다. 

2. 하지만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몇 년만 농사 지으면 지력이 쇠하여 한 장소에서 오래 농사를 짓지 못하고 이동하며 농사를 짓는 신석기시대 화전농경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몇 개 지역을 순회하여 화전, 경작, 이동하는 방식으로 잡곡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3. 한국과 달리 세계 다른 지역에는 신석기시대에 이미 특별한 휴경이나 시비 없이도 연작이 가능한 지역이 있었다.

토질이 매우 비옥하거나 정기적으로 강이 범람하여 기존의 토양을 뒤덮는 곳이 그러하였다.

동아시아의 경우라면 황하문명이 일어난 북중국이 이런 지역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불행히도 이런 지역이 아니었고, 신석기시대 내내 화전농경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중국의 중원 지역과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사회의 수준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다. 

4. 수도작 도입은 한국의 농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쌀 농사 자체가 탑재한 생산성도 있지만, 농업기술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논에 매년 새로 채우는 논물 덕에 지력의 고갈을 상당히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논농사의 경우 밭농사처럼 휴경할 필요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가 되면 화전농경을 위해 정기적으로 옮겨다니던 신석시기대 잡곡농경민과 달리 비로소 정착촌이 제대로 형성되고 농업사회의 성격도 보다 완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 Editor's Note ***

 
벼농사 도입 이후 종래의 화전 농법은 어찌 되었느냐 하는 문제도 심각한 사안이다. 

내가 보건대 이 화전은 전통이 아주 질겨 박정희 시대까지 이어졌다.

그 화전이 차지한 비중은 어느 정도였을까?

기후 지리 여건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본다. 

벼농사가 힘든 북쪽은 화전이 여전히 주류였을 것이며, 남쪽 또한 강원도나 경상도 산촌에서는 박정희 시대까지 그랬듯이 산촌을 중심으로 강고한 전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지금도 동남아 산촌은 화전을 벼농사와 병행한다.

특히 라오스나 미얀마 같은 이른바 저개발국은 두 가지 농법이 지금도 병행하고 있다. 

나는 이 화전에 대한 깊은 탐구를 위해 동남아 현지 조사를 해야 한다고 본다.

아프리카 같은 데서도 화전이 여전히 이뤄지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조사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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