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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겸(王先謙)과 《한서보주漢書補注》

by taeshik.kim 2018.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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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겸(王先謙. 1842~1917)은 字가 익오益吾, 號는 규원葵園이며, 호남湖南 장사長沙 출신으로 근대 중국의 저명한 경학가經學家로 흔히 규원선생葵園先生이라 부른다. 18세에 補廩膳生했다. 동치同治 4년(1865)에 진사進士가 되고 국사관편수國史館編修、한림원시독翰林院侍讀、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고금군서古今群書를 박람博覽하고 치학治學은 고거考據를 중시했다. 광서光緒 시대에 강소학정江蘇學政이 되었지만 銀 1천량을 희사해 남청서원南菁書院을 세웠다.


光緒 15年(1889)에 사직하고 고향 長沙로 돌아가 정착해 악록서원嶽麓書院 산장山長으로 장장 10년을 지냈다. 무술변법운동戊戌變法運動에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啟超의 급진사상을 반대했다. 光緒 26年(1900), 당재상唐才常이 자립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섭덕휘葉德輝와 더불어 호남순무湖南巡撫한테로 가서 고밀告密하니 唐黨被殺百餘名했다. 


光緒 28年(1902), 龍湛霖과 더불어 湖南煉礦總公司를 발기해서 만들고, 粵漢鐵路廢約自辦運動과 保路運動에 참여했다. 光緒 34年(1908)에는 內閣學士銜에 제수됐다. 선통宣統 二年(1910), 長沙에서 爆發饑民 搶米風潮하자 長沙의 士紳과 연합해 批評 湖南巡撫하고, 事後에 “梗議義糶”라는 罪名으로 被降 五級했다. 


1911年, 辛亥革命이 일어나자 改名하여 遙라 하고 재난을 피해 平江鄉野에 은거하고 閉門하여 著書했다. 1914年 長沙로 돌아갔다. 民國 6年(1917), 長沙에서 죽으니 향년 75세였다.


王先謙 學術成就 最大인 곳은 史學이니, 이에 해당하는 성과로 《한서보주漢書補注》、《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신구당서합주新舊唐書合注》、《십조동화록十朝東華錄》、《수경주합전水經注合箋》、《순자집해荀子集解》、《장자집해莊子集解》、《시삼가의집소詩三家義集疏》 등이 있다. 개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것이 《漢書補注》와 《後漢書集解》이니, 이는 여러 장점을 널리 섭취해 집대성한 것으로, 學術價值는 顏師古、李賢、惠棟의 評注를 능가해 《漢書》와 《後漢書》 주석 최고 성취로 꼽힌다. 후대 사학사가들이 평론하기를 “王氏所作補注、集解諸作, 都是校注書中標准的著作”이라 했다. 


《漢書補注》는 안사고顔師古 주를 열기한 다음에 '보주'라는 글을 표시해 왕선겸이 수집한 주석을 보충했다. 안사고 주석은 앞 시대 5종 주석, 곧 복건(服虔)과 응소(應소)와 진작(晉灼)과 신찬(臣瓚)과 채모(蔡謨) 주석을 기본으로 하고 다른 주석본을 증보한 것이다. 


보주에서 인용한 서목書目은 수나라 소해(蕭該. ?~?)의 《한서음의(漢書音義)》, 송나라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의 《예문지고증(藝文志考證)》, 청나라 전대소(錢大昭. 1744~1813)의 《한서변의(漢書辨義)》, 전대흔(錢大昕. 1728~1804)의 《입이사고이(廿二史考異)》 등 47명의 저술이다. 


王先謙은 더불어 경학대사經學大師로 꼽히기도 한다. 완원阮元에 뒤이어 《속황청경해續皇清經解》를 편집해 光緒 14년 6월에 全書를 輯刊 완성했다. 또한 요내姚鼐 뒤를 이어 《속고문사류찬續古文辭類纂》을 편수하니, 王闓運은 그를 두고 평하기를 “續編《皇清經解》, 縱未能抗行芸台(阮元), 續編《古文辭類纂》差足以肩惜抱(姚鼐)”라 했다.


언어문자학 방면에서도 자못 조예造詣가 있어 《석명소증보釋名疏證補》를 찬사撰寫했다. 그 외에 일생에 지은 詩文이 44卷, 1190篇에 이른다. 그의 저술인 《허수당문집虛收堂文集十六卷》과 《허수당시존虛收堂詩存十六卷》은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에 들었다.


李肖聃은 《성노필기星廬筆記》에서 이르기를 王先謙의 著述은 不外 “續、纂、選、輯” 四種이라 하면서 王先謙 本人은 不審 外文하고, 《五洲通鑒》、《外國地志》、《日本源流考》 諸書는 모두 請助手編篡이라 했다.


王先謙은 일찍이 말하기를 “學者苦志身後之名, 後來者當共惜之”라 했다. 피석서皮錫瑞는 王先謙의 《상서공전참정尚書孔傳參正》을 높이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該書는 “兼疏今古文, 說明精確, 最爲善本”이라 했다.


李肖聃는 《湘學略·葵園學略》에서 그를 贊하기를 “上箋辟經, 下征國史, 旁論文章, 用逮譜子. 四十餘年, 楚學生光”이라 했으며, 아울러 “長沙閣學, 季清巨儒, 著書滿門, 門庭廣大”라 말했다. 이런 평가들은 과찬이 아니며 정확한 평가다.


李伯元은 《南亭筆記》에서 말하기를 葉德輝 刻意巴結王先謙, 兩人狼狽為奸, 喜歡幹預地方事務, “久住省垣, 廣通聲氣, 凡同事者無不仰其鼻息, 供其指使, 一有拂意, 則必設法排出之而後快”라 했다. 이 때문에 그를 ‘楚學泰頭’라 하는가 하면 ‘學匪’니 ‘土霸王’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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