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아직 필자가 확증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대한 인식에서
종친에 대해서는 그 경제적 지분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되어 있다.
조선시대사가 당쟁 중심의 정치사,
성리학 도통을 중심한 학맥사에 집중하다 보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여러 성이 경합한 다양화한 사회라고 보기 쉬운데,
필자가 대략이라도 본 바로는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종친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 종친은 출사가 금지되어 정치적 발언이 위축된 탓에
이들의 경제적 비중까지 잊기 쉬운데
실제로 이들은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까지 정부의 재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조선은 왕족에서 갈려 나가면 적자는 물론 서자까지도 관리하며
몇 대 동안 출사하는 대신 소위 품위유지를 법적으로 해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친의 숫자가 급증한 조선 중기쯤에는 그 경제적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조선왕조가 중기에 겪는 곤란,
특히 재정적 곤란에 대해서는 대략 납세의 의무를 진 평민층 급감과 양반 면세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시기 그 숫자가 만만치 않았을 종친에 대한 경제적 부양,
이것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 본다.
대략 예컨데,
태종의 후손들이 종친에서 벗어나 사대부로 전환되는 시기가 16세기 전반이 되는데
이때까지는 계속 종친 숫자가 늘어나 국가 재정의 일정 부분을 가져갔을 것이므로,
16세기 전반-중반의 재정적 위기, 경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흐름에는
이 종친의 숫자 급증도 무시할 수 없을 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거의 그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는데,
아래 태종의 후손만 봐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태종의 경우이고,

세종의 후손은 또 이렇다.

이 세종 시점이 되면
태종 후손들이 다시 또 후손을 보게 되는 바
세종은 이 태종의 후손들, 태조의 후손들도 모두 먹고사는 일을 책임져야 했다.
종친은 출사를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 왕가의 후손들은 적자 서자를 가리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적서차별, 서얼금고는 종친의 경우에는 예외였던 까닭이다.
대략 중종대쯤이 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늘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재정적 부담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 [편집자주] ***
저 종친 관리에 민감한 이유는 잠재적 왕위 위협군이었고, 그래서 그네들의 정치 간섭을 아예 원천에서 배제하려 했으며(물론 이 역시 잘 되지 않아서 걸핏하면 칼부림이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반발을 억누를 장치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품계와 재산 보장이었다.
더 웃긴 건 왕의 사위가 되는 사람들도 출사가 원천으로 금지되었다.
그 반대 급부가 당연히 있어야 했으니, 추사 김정희 부친인가 조부도 이 방식으로 대대적으로 재산을 불려 예산의 갑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종친이 살아남는 길은 탱자탱자가 있을 뿐이었다. 주지육림에서 살아야 했다.
그네 중 일부가 틈만 나면 반란 세력으로 태어난다.
이 반발을 무시하지 못하는데, 이 측면들에 대한 심층하는 분석 접근이 당연히 있어야 하며, 혹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보건대 이 역시 보나마나다.
저 종친 관리가 국가 재정부담을 가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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