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미암선생 일기와 미암집 목판,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동문선(東文選)》이며 《속동문선(續東文選)》처럼 국가 주도, 혹은 심지어 개인이 편찬을 주도한 시문집은 로비의 산물이다. 말할 것도 없이 어떻게든 자기 조상 시를 많이 집어 넣으려 한다. 《속동문선》 증보판이 준비될 무렵, 미암 유희춘이 한 일이 이렇다. 그의 방대한 《미암일기(眉巖日記)》 제16권 선조 2년(1569) 윤6월 3일자에 보이는 내용이다.
박 직장(朴直長˙ 박개<朴漑>)이 찾아왔는데, 나는 선친이 지은 〈항우소시(項羽小詩)〉를 베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장군이 칼 들고 강동에서 일어나 / 將軍提劍起江東
천하를 싸잡아 손아귀에 넣었네 / 囊括乾坤掌握中
영포를 강중 밀사로 삼지 않았다면 / 不將英布江中使
어찌 팔년 보람 수포로 돌아갔으랴 / 那棄經營八載功
박군은 그 시가 씩씩하고 의미심장함에 탄복했다. 박군의 형인 대제학 순(淳)이 《속동문선》을 새로 증보하기에 내가 넌지시 이를 보였다다.
미암의 이 말은 내가 우리 아버지 시가 《속동문선》에 수록되도록 로비했다는 말이다. 이 시는 반드시 그 시문집에는 실어야 한다 해서, 그것을 일부러 베껴서 적어주기까지 한 것이다. 빠뜨리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내가 의아한 대목은 그렇게 로비를 했다고 동네방네 떠든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이 이처럼 분명하게 남은 사례는 드물기만 하지만, 저런 로비 활동을 벌인 사람이 어디 미암뿐이겠는가? 너도나도 저와 같이 했을 것이다.
개중엔 돈다발 싸들고 찾아간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사진2> 미암선생 일기,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미암은 저 시가 아주 좋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이런 시가 《속동문선》에는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저리 행동했다. 자기 아버지 시가 저 문집에 실린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도인 동시에 자기 가문, 나아가 자기 자랑이기도 하다.
허준을 발탁한 이로 잘 알려진 유희춘(柳希春·1513~1577)은 字 인중(仁仲)이요, 호가 미암(眉巖)이며, 죽은 뒤에 국가에서 받은 이름인 시호가 문절(文節)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인데, 증조부가 유양수(柳陽秀), 조부가 유공준(柳公濬)이고, 아버지가 유계린(柳桂鄰)이다. 본거지가 같은 호남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이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간 그는 권력 부침이 극심했다. 1547년 이른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엮여 제주로 유배됐지만 당시 제주는 전라도 관할이라, 고향 땅에서 가깝다 해서 저 먼 함경도 종성으로 안치되어 무려 19년이나 유배생활을 한다. 기나긴 유배라면 다산 정약용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알지만, 그보다 더한 혹독함을 견뎌야 했던 이가 미암이다.
선조 즉위와 더불어 마침내 복직하는 그는 주로 문한 분야에 종사하면서 나중에는 대사성과 부제학, 그리고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는 다시 중앙 무대에 복귀해 예조·공조참판을 지나 이조참판까지 역임하고는 낙향한다. 그는 23살 어린 율곡 이이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미암에 대한 율곡의 시선은 때로는 경멸적이기까지 하다.
저 미암일기에서 말하는 박 직장(朴直長)이란, 직장 벼슬에 있는 박씨로, 박개(朴漑)를 말한다. 본관 충주(忠州), 자가 대균(大均), 호는 인파처사(烟波處士)인 박개(1511~1586)는 미암보다 두 살 위로, 선공감주부·참봉·고산현감(高山縣監)을 거쳐 김제군수를 지냈으니, 그리 성공한 관료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향시만 합격하고 음보로 벼슬길에 나섰기 때문이다.
박순(朴淳)을 미암은 박개의 형이라 했지만, 미암이 순간 착란을 일으킨 듯하며, 실제는 동생이다. 자가 화숙(和叔), 호가 사암(思菴), 시호가 문충(文忠)인 박순(1523~1589)은 형과는 달리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시 문과에 장원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으니 성균관전적, 홍문관응교, 성균관사성, 이조참의, 대사헌,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장장 15년간이나 재직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인 박상(朴祥)의 조카이면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속동문선》은 글자 그대로 1478년(성종 9)에 펴낸 《동문선》을 계승해 1518년(중종 13), 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남곤(南袞)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우리나라 시문집이다. 23권 11책이다. 이에는 동문선 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종~중종 연간 시문을 모았다. 37종 문체 1천281편을 수록했다. 수록 작가는 서거정·강희맹(姜希孟)·김수온(金守溫)·김종직(金宗直)·남효온(南孝溫)·김일손(金馹孫)·김시습(金時習)·박은(朴誾)·성현(成俔)·김흔(金昕)·어세겸(魚世謙)·손순효(孫舜孝)·홍귀달(洪貴達)·채수(蔡洙)·김심(金諶)·이승소(李承召) 등이다.
저 《미암일기》 증언을 볼 적에 저 무렵에 《속동문선》 증보판 작업이 진행 중이었음을 안다. 박순이 관여한 증보판이 곧바로 나오지는 않은 듯하다.
미암이 인용한 아버지 시 중에 "영포를 강중 밀사로 삼지 않았다면(不將英布江中使)이라는 구절은 유방과 천하를 쟁패하던 항우(項羽)서 자기 손을 세운 허수아비 황제 초 회왕(懷王) 손심(孫心)을 나중에 영포를 시켜 강물에 담가 죽인 일을 말하거니와, 이런 행위에 대비되어 유방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회황을 애도하며 장사를 지내는 쇼를 함으로써 민심을 항우에게서 이반시켜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 일을 말한다. 요컨대 '강중사(江中使)'란 희제를 강물에 빠뜨려 죽이라는 밀명을 받은 사람이니, 곧 영포다.
항우가 그렇게 8년 동안이나 천하를 차지하고자 싸웠지만,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천하 민심이 그를 떠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도 저 시는 잘 썼다. 하고 많았을 아버지 시 중에서 유독 저 작품을 고른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미암 눈에는 그것이 가장 뛰어난 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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