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실상 2022년 마지막 평일인 오늘 배포한 보도자료 임진왜란 웅치 전적 사적 지정에 첨부한 저 사진을 보고서는 와! 저런 데서 한 판 붙었구나 했으니, 저런 고갯길이 용꼬라면 진짜로 뚫고 지나가려는 쪽에서는 무지막지 힘이 들겠다 싶다.
고개 양쪽 언덕배기에 포진해서 활과 총을 쏘아대고 돌을 또르륵 굴리면 몰살밖에 더 당하겠는가?
하지만 역사가 그리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지키려는 자가 있으면, 뚫으려려는 자도 가만 있겠는가? 갖은 수를 내서라도 그 지리적 약점을 커버하려 들기 마련이다.
이번에 임진왜란 웅치 전적(壬辰倭亂 熊峙 戰蹟 / The ImJin War UngChi Battlefield) 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적된 데가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51 일원과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산289 일원, 총 11필지 23만2천329㎡라는데, 저 중에 편의상 진안 쪽 지도를 얹어보니 아래라
이곳이 임란 때는 웅치 전투라는 저명한 쌈박질 장소라는데, 이곳을 일러
임진왜란 초기(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웅치 전투’가 발생한 곳으로 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군이 결국 승전하게 되는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 평가된다.
‘웅치’는 완주군과 진안군 사이 고갯길의 지명으로 웅치 일대의 옛길은 전주와 전라도 동부지방인 진안 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선조실록」등 여러 문헌에 기록된 ‘웅치’는 ‘웅현’, ‘웅령’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는‘곰티’ 또는 ‘곰치’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전투가 일어난 지리적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 하거니와, 그러면서 그것을 증언하는 흔적으로 임란 병란을 다 살다간 조선 중기 때 인물로 그 자신 의병장이기도 한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란 사람이 정리한 임란 보고서인 《난중잡록亂中雜錄》 권 제1권, 선조 25년 상, 6월 23일 이후 다음 자료를 인용했으니
전주 전 만호 황박이 모집한 군사 200명을 모아 웅현에 복병했는데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의 경계였다. 이때에 이광이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 등으로 복병장을 삼아 웅현을 파수케 하였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全州前萬戶黃璞聚自募軍二百餘名設伏于熊峴乃全州鎭安之界也時李洸使羅州判官李福男金堤郡守鄭湛等爲伏兵將把守峴上璞爲之助焉.」
이걸 찾아봤다. 다행히 한국고전번역원에 저 문헌 번역 전문과 원문이 수록됐으므로, 검열이 아주 편한 시대를 산다는 사실에 나는 오늘도 감사한다. 해당 구절을 옮겨본다.
전주 전 만호萬戶 황박黃璞이 자원한 군사 200여 명을 모아 웅현熊峴에 복병을 설치하니,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鎭安의 경계이다. 이때에 이광李洸이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감鄭湛 등을 복병장으로 삼아 웅현을 파수하게 했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全州前萬戶黃璞聚自募軍二百餘名設伏于熊峴乃全州鎭安之界也時李洸使羅州判官李福男金堤郡守鄭湛等爲伏兵將把守峴上璞爲之助焉.」
"聚自募軍二百餘名" 이 대목을 자원한 군사라 옮겼는데, 혹 모은(모인) 군사 중에서 200여 명을 가려뽑았다는 뜻 아닌지 모르겠다.
나아가 문화재청이 말하는 저 출처 "《난중잡록亂中雜錄》 권 제1권, 선조 25년 상, 6월 23일 이후"는 좀 묘해서 기술이 정확치 않다.
6월 23일자 이후에 기록된 내용이라 해서 저리 적은 모양인데, 원문은 살피면, 그달 6월에 일어난 일 중에서도 정확한 날짜를 모르는 일은 저 날짜 이후에다가 디립다 모아놓은 것이다. 혼란을 야기할 만한 구절이므로 내가 바로잡는다.
이 전투 당시 총사령관은 이광李洸(1541~1607)이라 호조참판,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고관대작이라 혹 이 무렵 관찰사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사가 필요하지만 그쪽까지 내 힘이 부친다.
암튼 저 구절을 보면 이광李洸 진두 지휘 아래 나주판관 이복남과 김제군수 정감 등이 포진했고, 그러한 관군에 의병장 황박이 합세한 것이다. 저 구절을 보면 조경남이 의병장을 우대해서 그 주체의 시각에서 기술했음을 본다.
그렇다면 웅치 전투는 어찌 전개됐을까? 같은 《난중잡록亂中雜錄》 권 제1권 7월 8일자가 전개된 내용이다.
적이 웅현熊峴을 넘으니 복병장伏兵將 김제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싸우다 죽다.
처음에 도복병장인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이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황박黃璞이 그 위에서 지키며 정담은 그 아래서 지키는데. 이광李洸이 장병을 더 보내어 군의 위세를 도왔다.
이날 동이 틀 무렵에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선봉 부대가 모두 기旗를 등에 꽂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가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먼저 나와 활을 쏘아 낱낱이 명중시키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우니 적병이 점점 퇴각하였다. 아침 해가 동으로 올라와, 뒤의 적이 산과 골짜기를 덮으며 크게 몰려오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산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어울려 번쩍이고 나는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뒤를 이어 응원하는 적이 얼마 안 있다가 또 와서 합세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과 같았다.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 되어 무너져 나주 진중으로 들어갔다. 적병이 승세를 타고 충돌하여 고갯마루로 오르니 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후퇴하여 살 수는 없다.” 하고, 용감히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안덕원安德院(전주 동쪽 10리 길에 있다)에 군사를 주둔하였다.
이걸로 보면 싸움의 승패가 어찌되었는지 가늠이 쉽지는 않다. 다만, 저 많은 희생을 딛고 왜군은 웅치를 넘었다.
저 구절 뒤에 "그 후 만력萬歷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김제군 유생儒生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담의 덕과 의를 사모한 나머지 그 공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김찬金瓚에게 신원장申寃狀을 올렸다"고 하면서 그 신원장 전문을 채록했으니 아래와 같다.
조성립 등이 검찰사(檢察使) 상공(相公) 합하(閤下)에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권면하는 법전입니다.
작고한 군수 정담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강개하며, 난리가 한창 심할 적에 본군 원으로 오게 되자 충성심을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용맹 있는 장정들을 뽑아들여 소 치고 술 걸러 배부르게 먹이니 병사들이 감격하여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공산(公山)으로부터 진을 파하던 날에(공산은 곧 공주公州이니, 이광李洸이 처음 근왕勤王한 곳이다.) 전 현감 어득준(魚得濬)과 더불어 울며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근왕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주장(主將)의 뜻을 알 수 없다. 장차 의병을 이끌고 멀리 전하의 행차를 따를 생각을 하면서, 육지를 거쳐 좇으려고 하는가. 경기의 왜적이 그득히 퍼져서 바다를 건너 고을로 진군하고 있으니, 연해(沿海)가 아니면 본래 배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전하께서 계신 데까지 이를 것인가.” 하였습니다.
매양 밥상을 대하면 문득 송구하게 여겨 달게 먹지 않으면서 장좌(將佐)들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나물 한 가닥 쌀 한 톨이 모두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주상께서 서도(西道)로 파천하시어 기갈(飢渴)이 매우 심하실텐데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차마 이 밥을 먹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 편안할 일이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본군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에 과거에 올라 아무 해에 아무 벼슬이 되었다가 지금 또 급이 올라서 이 고을에 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미 후히 입었다. 하물며 아들 하나가 있어 집안 일을 맡길 만하니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인하여 목이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백광언(白光彦)에게 왕래하여 합심해서 적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도내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용감한 자들이 마음을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병장이 되어 웅현熊峴에 방어하러 갈 적에는 주효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고사를 지내고 떠났으며, 그곳에 가서 보고는 험준한 데를 가려서 나무를 베어 울을 막고 군사들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절대 싸워야 하며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병 만여 명이 고개로 올라오자 군수가 활쏘는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진 앞에 서서 활을 쏘는데, 하나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적의 무리가 쓰러져 여러 번 퇴각하였습니다.
적의 괴수 한 놈이 백마를 타고 붉은 기를 꽂고 그 무리를 독려하여 곧장 진 앞으로 다가오자, 군수가 다시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며 여러 장령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화살로 반드시 저 괴수놈을 떨어뜨릴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모두가 탄복하였습니다.
혹자가 나가서 그 적의 귀를 베어 오려고 하자 군수가 꾸짖고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내 진중에 있는데 어찌하여 공을 탐내느냐.”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적이 군수의 진은 마침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주 진의 허술한 곳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오니 그 진의 장병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바삐 와서 말하기를, “저쪽 진이 이미 무너져 적의 선봉이 충돌해 들어오니 조금 후퇴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군수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종사관 이봉(李葑) 및 보좌관 몇 명과 더불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이 몸을 끌고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길게 몰아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활을 쏘니 뒤미처 오는 적이 일시에 사방을 포위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본군 사람들이 가서 군수의 시체를 찾는데, 쌓인 시체 속에서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싸우다 죽을 뜻은 평소부터 정해졌던 것입니다.
살아 돌아온 각 읍 장병들이 오며 가며 서로 말하기를, “아무 고을 군수는 적을 토벌할 적에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고 맞히면 반드시 꿰뚫었다. 그가 단독으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며 또 그가 죽인 적의 장수는 가장 괴걸한 자인데, 그 적이 바로 전라 감사라 자칭하던 자다. 적은 글월을 만들어 제사하며 통곡하고 돌아갔다. 흉악한 왜적이 마침내 전주에 충돌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담의 힘이니 어찌 난리가 평정된 이날에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풍패(豐沛 전주)를 보존한 공을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며, 경내에 초빈을 하고 초하루·보름과 세시(歲時)에 곡하고 제를 지내니 본군 사람들이 의를 사모하는 것은 이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 흉적이 물러갔으니 죽은 이의 충렬을 위로하고 장래의 용사를 격려하는 것이 국가에 있어 어찌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조정에 장계하여 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국가 훈장을 달라 해서 적어낸 공적 심사보고서라, 과장과 왜곡이 많을 것이라는 점은 항상 염두에 두고 곱씹어야 한다.
7월 개봉한 영화 ‘한산’이 재조명한 웅치 전투를 거쳐 왜국은 전주 부근까지 나아가기는 했지만, 웅치에서 된통 당하는 바람에 전력을 채 정비할 수가 없었다.
꼭 영화 영향이겠는가? 그럼에도 영화가 웅치 전투 현장의 사적화를 앞당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영우가 창원 팽나무를 천연기념물로 만들었듯이 한산은 웅치를 사적으로 우뚝 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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