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영양왕 23년(612), 고구려를 침략한 수나라 백만 대군을 살수에서 몰살함으로써 대승을 이끈 고구려 대신이다. 기타 그의 가문 내력과 행적을 알 수는 없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을지문덕 열전 :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의 선대의 계보를 알 수 없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겸하여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 수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에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右翊衛) 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와서 아홉 개의 군부대와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을지]문덕(文德)이 왕명을 받아 그 진영에 나가 거짓 항복하니, 사실은 그 허실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에 앞서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 하였다. [우]중문 등이 억류해두려 하였는데,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였는데 굳이 말리므로, 그만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곧 바로 뉘우쳐 사람을 보내 “더 의논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을지]문덕을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돌아 왔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놓치고서는 속으로 불안해 하였다. [우문]술은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였고, [우]중문은 정예 부대로써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다. [우문]술이 말리자 [우]중문이 성을 내며 “장군이 10만 병력을 가지고 능히 이 작은 적을 무찌르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는가?” 하였다. 이에 [우문]술 등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압록강을 건너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피로케 하고자 하여 싸움마다 문득 패하니, [우문]술 등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다 이겼다. 이미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또 중의(衆議)에 몰리어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까지 30리 되는 지점에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신통스런 계책은 천문(天文)을 뚫었고, 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아 그만두시지!』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달래었다.[을지]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고, [우문]술에게 “군사를 돌려 가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직접 뵙겠다.”고 하였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로하고 고달파함을 보고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단단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움을 알고는 마침내 그 거짓 [항복을] 받은 것을 핑계삼아 돌아가는데 방진(方陣)으로 편성하여 행군하였다. [을지]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면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군사를 전진시켜 그 후미를 공격하여 우둔위(右屯衛)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죽였다. 이에 모든 부대가 함께 허물어졌으나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아홉 부대의 장군과 병사가 달아나 돌아감에 밤낮 하루 동안에 압록강에 도달하였으니, 450리를 걸었다. 처음 요하를 건넜을 때에는 아홉 부대의 군대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되돌아 간 자는 겨우 2천7백 명이었다. 論하여 말한다. 양제(煬帝)가 요동 전쟁에 보낸 군대는 이전에 유례없이 많았다. 고구려는 한 귀퉁이의 작은 나라로서 능히 이를 막아내어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능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랴?』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8 영양왕 23년(612) : 6월 기미(己未)[11일]에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 허실을 보려 한 것이었다. 우중문이 앞서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우]중문이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다시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시 오시요.”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속으로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이 정예군으로 [을지]문덕을 쫓으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이것을 굳이 말리니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은 10만 군사에 의지하고도 작은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올 것이요? 또한 [나] [우]중문은 이번 걸음에 본래 공로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소. 왜냐하면 예전의 훌륭한 장수가 능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었는데, 지금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이때 황제는 [우]중문이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여러 군대로 하여금 [그에게] 지휘를 묻고 품의하게 하였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부득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도망가니,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이] 이미 여러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강제되어, 이리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대를 돌리시면 왕을 모시고 [황제의] 행재소로 알현하겠습니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로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서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고, 마침내 그 속임수에 따라 되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형의 진을 이루고 행군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 싸우며 한편 행군하였다. 가을 7월에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후군을 쳤으므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하였다.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대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오직 위문승의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넜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가 다달았을 때는 겨우 2천7백 명이었으며, 쌓아둔 기계가 억만을 헤아렸으나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25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전에 백제 왕 장(璋)[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백제를] 시켜 우리 나라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장은 안으로 우리나라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장차 출동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출병할 시기를 알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모일 시기를 알렸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치었다. 이 정벌에서 [수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삼국사기 권 제43(열전 제3) 김유신 : 논하여 말한다. 당나라의 이강(李絳)이 헌종(憲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되고 정직한 이를 나오게 하며, 대신과 더불어 말할 때는 공경하고 믿음 있게 하여 소인을 참여시키지 말며, 어진 이와 놀 때에는 친하되 예절 있게 하여 어리석은 자가 끼여들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참되도다! 이 말이여! 실로 임금의 정치에 중요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진 이에게 맡기어 의심하지 말며, 사특한 자를 제거하여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함을 보건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일을 맡겨 의심치 않으며, 꾀를 내면 행하고 말을 하면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쓰여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이른바 [주역]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吉)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한 바를 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과 협동 모의해서 3국을 합치어 한 집을 만들고, 능히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려 일생을 마치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기록이 없어져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는데,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고려]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가 알아줌은 당연하지만 꼴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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