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고학도 차순철[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이 2005년 파격적인 주장 하나를 들고 나왔으니,
황남대총 사례를 중심으로 저 거대한 봉분 안에서 드러난 미터스터리한 목구조물이 다름 아닌 저에 묻힌 사람이 죽어 저 무덤에 최종으로 묻히기까지 그 시신을 보관 안치하던 빈전殯殿이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빈전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빈소다.
죽어 무덤 문이 닫히기 전 그 시신을 임시로 안치하는 공간으로 여기서 상주는 조문객을 맞으니 이는 지금도 그대로 한국사회에서 이어진다.
부고를 전할 적에 빈소는 어디라고 하는 통지, 그 통지문에 드러나는 장소, 흔히 이를 요즘은 장례식장이라 하거니와, 이 장례식장이 빈소殯所이며,
그 기간 각종 의례를 하는 행위 자체를 殯이라 한다.
이에서 소렴이니 대렴이니 하는 시신을 입히고 치장하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서른일곱살 차순철은 황남대총皇南大塚이 시신을 안치한 다음 일정 기간에 그 사자死者를 위한 각종 제사를 올리는 건물인 빈전殯殿을 그대로 돌과 흙으로 덮은 고분이라는 요지를 담은 주장을 신라사학회 기관지 '신라사학보' 제3집에 '황남대총의 유물 부장 위치를 통해 본 제의祭儀 행위 검토'라는 투고 논문을 통해서 그와 같이 말했다.
이 논문을 보면 황남대총을 구성하는 남분南墳과 북분北墳 모두 축조가 시작되고 시신이 안치된 다음 곧바로 봉토封土를 만드는 작업이 하나의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별도의 공정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각 단계의 장송葬送 의례가 다단계로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로 현재의 모습처럼 우람한 모습으로 거대한 봉토가 완성되기 전, 이곳에는 빈전殯殿으로 볼 수 있는 거대한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을 주목했다.
사실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모두 현재의 봉토 안에 장방형 목조건물이 있었고, 또 그것이 시신을 안치한 목관木棺과 목곽木槨을 비닐하우스처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는 점은 널리 지적돼 있다.
하지만 이 목조건물이 갖는 기능에 대해서는 발굴보고서나 관련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피장자(묻히는 사람)를 목곽 안에 안치하고, 부장품(껴묻거리)을 수납하는 기간에 초대형의 봉분을 만들면서 그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기능", 즉, 일종의 프레임(frame) 같은 구실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분의 경우 이런 목조건축물은 규모가 동서 24m, 남북 20m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차순철은 이 목조건축물이 구조나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만드는 데만도 적어도 수십 일 이상이 소요되었음에는 틀림없고,
나아가 부장품 출토 양상으로 보아도 일종의 빈전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황남대총은 남분이나 북분 모두 축조 시점에서 봉토 완성 시점까지 1. 분묘 조성을 위한 대지 조성 작업 2. 그 위에 자갈을 깔고 주사朱砂를 뿌리는 행위 3. 목관과 목곽 안치 4. 빈전에 비견되는 목조건물 설치 5. 냇돌과 흙으로써 봉토 조성 등의 과정을 거쳤다.
이런 단계마다 사자死者를 위한 다양한 제의(장송) 행위가 거행됐으며, 그 때마다 주사나 운모雲母를 뿌린다거나, 음식물 대용인 작은 바둑돌 같은 제의 음식을 바치거나, 토기나 마구류 등의 부장품을 안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은 모두 빈전을 그대로 냇돌과 흙으로 덮어버린 무덤이 되는 셈이다.
단언한다.
그의 주장은 맞다.
이 주장이 이후 고고학계에서는 이리저리 검토된 것으로 알지만, 그에 대한 지지세를 그다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주장은 팩트의 기술이다.
간단히 말해 맞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한 금관총 조사에서도 저와 같은 목구조물이 확인되었으니, 가장 생생하게 우리가 그 여실한 규모를 보았다.
저 거대한 목구조물이 왜 무덤 안에 들어갔겠는가?
저 적석목곽분은 구조로 보아 저와 같은 목구조물을 무엇보다 프레임과 같은 기능으로 사용할 리도 없고, 사용하더라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집을 그대로 덮어버린 것이다.
저 목구조물은 그런 까닭에 빈전이며, 그 빈전이 있었기에 그 내부는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과 같은 아주 정밀한 분포 배치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시신을 안치하는 안방, 손님을 맞는 방 등등으로 나뉘었다.
문제는 시신을 옮기는 데 쓴 상여! 상여는 어디로 갔는가?
발표 20년 만에 나는 그의 주장을 승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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