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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지금의 세종 일대를 지배한 한성시대 백제의 오야붕과 그 가족 공동묘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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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서 백제 한성기 대형 고분군 확인…"유력 지방세력 존재"
김예나  / 2023-03-22 10:13:39
무덤 봉분 아래 여러 매장시설 존재…'위세품' 귀걸이 한 쌍도 출토
"유사한 형태 있으나 동일한 유적 확인 안 돼…4∼5세기 축조 추정"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세종시에서 백제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군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2021년 7월부터 세종 스마트그린 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부지 내 유적을 발굴 조사한 결과, 거대한 다곽식 적석분(積石墳) 형태의 고분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43896954534 

세종서 백제 한성기 대형 고분군 확인…"유력 지방세력 존재"

무덤 봉분 아래 여러 매장시설 존재…′위세품′ 귀걸이 한 쌍도 출토"유사한 형태 있으나 동일한 유적 확인 안 돼…4∼5세기 축조 추정"(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세종시에서 백제 한성

k-odyssey.com

 
 
이 소식이 퍼뜩 그 까마득한 옛날 행복도시라는 이름의 예정지에서 출현한 지하궁전형 백제 석실분이 아닌가 했는데, 살피니 그와는 조금 양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같은 한성기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나아가 같은 세종이라는 점에서도 한성기에 지금의 세종을 무대로 꽤나 방귀께나 끼는 유력 집단이 할거한 곳이 아닌가 하는 심증도 준다. 

저 보도와 문화재청 오늘자 보도자료를 종합하면 문제의 발굴현장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 1-12번지 일원이며, 이곳은 ‘세종 스마트그린 일반산업단지'가 들어설 곳이라 한다.

 

전체 양상이 이렇다는데, 보다시피 오야붕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시다들은 그 아래 주변에 위치한다. 오른쪽 중앙에 구상적석유구라 표시된 지점, 혹은 오른쪽 상단 적석유구는 아마 제단이 아닐까 한다. 이게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이라면(?) 저 적석유구는 제물을 태우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한얼문화재연구원이 수주한 발굴은 2021년 7월에 시작해 최근 종료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사기간 중에는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발표는 하지 않고(혹은 못했거나) 하다가 그냥 넘기기는 그렇다 해서 이렇게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요는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시절(BC 18~AD 475)에 만들었음이 확실한 다곽식多槨式 적석분積石墳이라 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용어를 뜯어봐야 한다. 

시신을 직접 감싸는 상자를 관곽棺槨이라 하는데, 관이야 요즘 한국사회에서도 널리 쓰니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고, 곽槨은 그것을 감싼 또 하나의 널이다. 그래서 흔히 이를 영어로는 outer coffin이라 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슨 무덤에 곽이 확인됐다 함은 당연히 그 안에는 그보다 작은 시신 상자인 관이 있다는 말과 같다. 

 

1호분 주인공 시신이 묻힌 곳(6호 석곽)인데, 저 칼 위치로 판단하고 또 귀걸이 위치로 보아 시신이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두었는지를 파악한다. 이 사진 기준으로 위쪽이 아마 머리였을 것이다.

 
다곽식이라 함은 그러한 곽이 많다[多]는 뜻이니, 이런 덧널을 여러 개 쓴 무덤방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석분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돌무지를 쌓은 무덤이라는 뜻이다. 용어 그대로만 풀면 다곽식 적석분은 덧널을 한 군데다가 여러 개 안치한 돌무지 무덤이란 뜻이다.

그 돌무지는 아마 봉토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일단 용어로만 보면 그렇다는 뜻이지만, 한국고고학이 그렇게 엄밀한 데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돌무지 우에다가 다시 흙을 덮었다면 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 정도로 표현해야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한국고고학은 이런 경우 곧잘 그냥 적석분이라 하고 만다. 

아무튼 이번에 저 공사 예정지에서 백제 한성시대 그네들이 만든 무덤 5곳이 발견됐으니, 이들은 모두 주변을 조망하는 해발 약 109m 높이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단다. 저들이 동시기 혹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다면 당연히 특정한 가족공동체 무덤일 것이며, 이 경우 그 가문은 말할 것도 없이 주변 일대를 지배한 유력자가 되겠다. 

 

1호분 6호 석곽 유물부장칸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껴묻거리 공간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방식은 신라 혹은 가야 색채가 짙은 셈이 되는데???

 
나아가 그 주변에서는 이들 고분으로 통하는 진입로 추정 시설과 집터를 비롯해 40여 기에 이르는 관련 유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집터 역시 한성백제기에 속한다면 이 공동묘지 관리와 관련하는 시설일 터인데, 공동묘지와 그것의 운영제반 시설이 세트로 확인되기는 석촌동고분 말고 또 있는지 나는 더 이상 사례를 기억하지 못한다. 
 
보통 이런 종족 공동묘지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그 가문 시조 혹은 중시조에 해당하는 사람 차지라 그래서 보통 주변 무덤보다 규모도 크고 출토하는 유물도 압도적으로 위상이 높다.

이곳에서도 역시 중앙 정상부 무덤이 가장 커서 1호분이라 명명한 이곳은 봉분이 최대 규모 지름 약 58m에 이르고 높이는 약 6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단다. 엄청난 규모다.

"돌로 쌓은 거대한 봉분 내부"라는 표현으로 보아 내 예상대로지 않는가? 무덤방을 만들고 그 우에다가 돌을 쌓고 다시 그 우에는 흙으로 덮었다.

 

1호분 6호 석관 다양한 모습. 바닥에 판돌을 깔았다. 왼쪽 사진은 바닥에 쌓인 흙을 걷어내는 과정이며, 오른쪽 하단은 그것을 걷어내고 드러난 바닥이다.

 
"유적 보존을 위하여 고분 내부조사를 완료하지 않았"다는 말로 보아 현장은 보존조치됐다. 이런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시설은 목관(곽) 5기와 석곽 10기라 하며, 그 안에서는 크고 작은 항아리류와 개배(蓋杯, 뚜껑 있는 접시), 삼족기(三足器, 발이 세 개 달린 그릇) 등 전형적인 백제 토기와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재갈, 화살촉 등 무기, 마구를 비롯한 껴묻거리가 나왔단다.

1호분 안에 들어앉은 8호 석곽이라 명명한 곳에서는 금제가는고리귀걸이(금제세환이식) 한 쌍도 출토됐다고. 

 

조사단은 이런 설명을 붙였다....2호분 지상식의 목관 석곽이 연접된 후 커다란 하나의 봉분과 주구를 형성하였다. 무슨 말인지 아리숑숑한데, 아무튼 각기 무덤을 쓰고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은 장치 혹은 흔적이 드러났다는 뜻이다.

 
1호분을 기준으로 서쪽 경사진 곳에서 맞닿아 만든 2~5호분은 봉분 지름 20m 안팎, 높이 2.5m 안팎인 상대적 작은 규모들로, 여러 겹 돌로 쌓은 1호분과 달리 흙을 이용해 봉분을 만들고 소수 매장시설(2~6기)을 갖추고 있어 1호분보다 낮은 위상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결국 딸린 무덤인 셈인데, 1호분 직계 후손들일 것이다. 

이번 발굴에서 주목할 대목은 이 공동묘지 남쪽 경사진 곳에서 구릉 아래쪽에서 고분으로 올라가기 위한 추정 진입로가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다. 약 50m 길이인 긴 도랑 내부에 돌무지시설을 한 형태라는데 이 점이 좀 이해가 선뜻 가지는 않는다.

그밖의 주변에선 1호 수혈 주거지라 명명한  부속건물과 제단으로 추정하는 시설이 드러났다고 하니 내 예상과 빗남은 없다. 

 

이에 대한 설명....구상적석유구(67m×12m)_ 1호분과 약 20m 떨어진 곳에서부터 평지까지 이어져 있다. 이걸 진입로 시설로 볼 수 있을까? 배수로 아닐까 모르겠다.



매장시설과 부장품, 출토 유구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분은 4~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한단다. 
 
좀 더 상세한 자료를 얻어 소식을 추후 보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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