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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풍운아 황철黃鐵(1864~1930)의 글씨 두 장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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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운아'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는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글쎄, 사전에서의 뜻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거칠고 굴곡진 인생을 산 이들을 가리켜 그렇게들 부르는 듯하다.

개화 바람이 불던 근대 한국엔 흥선대원군이나 김옥균처럼 유달리 그런 '풍운아'가 많았다. 이 글씨 주인 황철黃鐵(1864~1930)도 개중 하나라 할 만 하다.

2. 황철은 字가 야조冶祖, 호는 어문魚門·무명각주無名閣主라 했는데 주로 자를 호처럼 썼다.

서울 출생으로 부유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의 인생이 굽이치기 시작하기는 1882년, 집안이 소유한 광산에 사용할 독일제 채굴기계를 구입하려고 청에 건너가면서였다.

기계를 산 뒤에 그는 상하이에 머물면서 사진촬영술을 익히고 사진기계를 구입하여 귀국, 이듬해 자기 집에 사진관을 마련하고 사진들을 찍기 시작한다.

이즈음 도화서를 혁파하고 사진으로 화원 임무를 대체해야 한다고 국왕한테 상소하기도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개화파로 지목된 그의 사진관은 성난 민중한테 부서져버린다.

3. 다시 청으로 간 의지의 사나이 황철은 1885년 또 상하이에서 사진기자재를 구입하고, 일본으로 가 그곳 사진관들을 둘러본 뒤 1886년 귀국한다.

귀국한 그는 김윤식(1835~1922) 집을 사서 거기에 사진관을 새로 열었다.

1895년 포천군수가 되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6년 사면을 받아 귀국하여 농상공부협판에 임명되었고, 그 뒤 강원도 관찰사와 경상남도 관찰사를 거쳐 종2품 가선대부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서화에 몰두한다.

1913년부터 약 10년간 일본을 여행하며 수 차례 서화전람회를 한 황철은 1930년 일본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접었다.

4. 황철은 지운영(1852~1935)에게 서화를 배웠다고 전한다.

"鐵철"이란 이름과 "야조冶祖"라는 자도 지운영이 지어주었다 하며, 죽을 때까지 지운영과의 인연은 그치지 않았다.

황철이 그림을 그리다가 미처 다 못 그리고 죽자, 지운영이 그것을 받아 마저 그린 합작 산수가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에 남아있다.

지금 남은 작품들을 보면, 황철의 것이 지운영과 닮긴 했는데 느껴지는 기세는 그보다 더 강렬하고 거침이 없다.

황철의 이런 필치를 '대륙적'이라고 하며 그의 중국 체류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일본 글씨 영향을 짙게 받은 게 아닐까도 싶다.

1900년대 일본 서단에는 일본에 온 중국인에게 배우거나, 중국에서 직접 글씨를 배운 이가 많았다.

그리고 황철은 일본에 있는 동안 많은 지식인, 예술가들과 서화를 매개로 교유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작품이 일본에 남아있다.




5. 우연찮게 쌍둥이처럼 거의 같은 황철 작품 두 점을 만났다(사진촬영을 허락한 소장자께 감사를).

형식도 필체도 그렇고, 종이도 같아서 한 자리에서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따로 돌아다니다가 10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이다.

사연도 흥미롭지만, 일필휘지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나는 작품도 오랜만이다. 낙관인 각도 일품이다.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

봄 바람 같은 큰 아량은 능히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아니한다(우)

시 읊기 마치니 작은 누대에 어디선가 젓대소리
홀로 자다 반쪽 강에서 부는 바람에 술이 깨었네(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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