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계의 초기 자본주의 맹아론은 대부분 실록 등 기초자료에 의해 의거해 있으며
특히 17세기의 사실에 대해서는 견강부회가 많다.
광작, 지주전호제, 화폐의 유통 등 자본주의 맹아론의 성공적 입론과 관련하여
반드시 관철되어야 할 사항들이 대부분 모호한 언설에 기초하여 성립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 후 일기나 호적 등 자료가 속속 추가 되면서
당시의 팩트와 맞지 않는 경향이 도처에 노출되었음에도
여전히 지금까지 타성에 따라 그대로 이야기 되는 경우를 본다.
17세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과 18세기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19세기에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에도
17-19세기를 묶어서 설명하며 대충 얼렁뚱땅 이야기 하고 치운다.
따라서 읽는 독자는 17세기에 이미 그런 변화가 우리나라에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위에 언급한 자본주의 맹아 관련 변화는 모두 영조 이후의 일로
그 이전에는 기대 난망이다.
이런 사실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모를 리도 없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뭉개고 있는 것이라 판단한다.
부북일기는 북방에 군관으로 복무하기 위해 박계숙, 박취문 부자가 남긴 일기로
전자는 1605년의 사실을 남겼고,
후자는 1644년의 사실을 남겼다.
1605년에서 그리는 상황은
불과 십여년 전 오희문이 임란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남긴 이야기와 거의 진배 없어
상품화폐경제의 실마리도 안보인다.
전부 물물교환이며 이것이 선물경제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1644년 박취문의 일기는 다른가?
여기도 여전히 화폐는 없고 현물 거래다.
급료와 대가를 전부 현물로 치른다.
어디에도 화폐의 흔적은 없다.
19세기 말 하재일기를 보면
더 이상 물물교환의 흔적은 없다.
최소한 서울에서는 완전히 화페경제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일기에서도 볼수 있다.
필자는 17세기까지 상품화폐경제의 실마리를 끌어올리고,
자본주의 맹아를 그 시절까지 소급시켜 굳이 일본의 에도시대 조닌 경제와 비슷하게 보이려는 동기라고 생각하는데,
17세기에 그런 맹아가 보였다면 당연히 일기에서 보여야 옳다.
이른바 광작운동의 결과 자본가적 차지농이 있었다면
그런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자본가적 차지농이 이 사람이라고 우리나라 사료에서 정확히 핀포인트 되어 사례가 거론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필자가 들은 바 흥부전 놀부가 자본가적 차지농이라는건데
돈이 돌지를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자본가적 차지농이 나온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여러번 썼지만 자본주의 맹아론 관련해서는 지금처럼 17-19세기를 묶어 서술하며 얼렁뚱땅 넘길 게 아니라,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 17세기면 17세기, 18세기면 18세기, 19세기면 19세기라고 확실히 언급하며 분명히 서술해야 한다.
하다못해 발굴 현장 토기도 4세기 1/4, 2/4로 나누어 편년하는 나라에서[뻘짓이기는 하다만...편집자주]
유독 자본주의 맹아론 관련 서술만 17-19세기를 뭉뚱그려 대충 서술하고 넘어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 [편집자주]***
드라마에 흔히 보이는 주막집도 실은 없다.
룸싸롱? 그딴 게 어딨어?
조선시대 룸싸롱, 자본주의 맹아론이 빚어낸 촌극
https://historylibrary.net/m/entry/room-salon
조선시대 룸싸롱, 자본주의 맹아론이 빚어낸 촌극
도대체 이런 발상을 누가 처음 하게 되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조선시대를 무대로 삼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언젠가부터 룸싸롱이 버젓이 등장하거니와 하도 그런 시대극이
historylibr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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