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현장

콘크리트 쑤셔박아 만들어낸 스톤헨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1. 23.
반응형
1835년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이 화폭에 담은 스톤헨지다. 지 맘대로 댄싱하는 중이다.


기록된 역사를 통틀어 스톤헨지와 그 주변 기념물은 고고학자와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존 오브리John Aubrey는 1666년 과학적 시각으로 이 유적을 최초로 조사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 기념물 설계도에 현재 자기 이름을 딴 구덩이인 오브리 홀을 기록했다.

윌리엄 스터클리William Stukeley는 18세기 초 오브리를 이어받아 조사했으니 주변 기념물에도 관심을 갖고 커서스Cursus와 애비뉴Avenue를 다소 부정확하게 식별했다.

그는 또한 주변 무덤barrows을 발굴하기 시작했으며, 드루이드Druids와 관련한 유산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이곳을 드루이드인의 매장지Druids' Barrows라고 불렀다.

스톤헨지를 가장 정확하게 측량한 초기 인물은 1740년 바스 건축가 존 우드John Wood, the Elder다. 이 기록은 1797년에 무너졌다가 1958년에야 복원된 남서쪽 삼리톤trilithon이 붕괴되기 전에 작성됐다. 

윌리엄 커닝턴William Cunnington 또한 근대 스톤헨지 역사에서 뺄 수 없다. 그는 19세기 초에 발굴조사를 벌여 주변에서 약 24기 무덤을 발굴하고는 탄 나무, 동물 뼈, 도기와 같은 유물을 발굴했다.
 

July 1877에 찍은 스톤헨지. 사진 자료 중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에 속한다.

 
그는 또한 슬로터 스톤Slaughter Stone이 원래 박힌 구멍 자리를 확인했다.

리처드 콜트 호어Richard Colt Hoare는 커닝턴 작업을 지원하며 솔즈베리 평원에서 약 379기 고분을 발굴했는데, 그중 약 200기는 스톤헨지 주변에 있었으니, 개중 일부는 윌리엄 콕스William Coxe와 함께 발굴했다.

후대 발굴자들에게 자신들의 작업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발굴하는 모든 무덤에다가 머리글자를 새긴 금속 토큰을 조심스럽게 남겨 두기도 했다.

커닝턴 발굴품은 윌트셔 박물관Wiltshir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1877년,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지렁이의 작용을 통한 식물성 곰팡이의 형성The Formation of Vegetable Mould Through the Action of Worms』을 위해 이 돌들을 연구하며 유해가 땅속으로 가라앉는 속도를 실험하기도 했다.

22번 돌은 1900년 12월 31일 거센 폭풍에 붕괴됐다. 

윌리엄 가울랜드William Gowland는 1901년 이 기념비 첫 번째 주요 복원 작업을 감독했는데, 여기에는 낙하 위험에 처한 56번 사르센 스톤sarsen stone을 곧게 펴고 콘크리트를 세우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1920년 복원 작업을 묘사한 어느 신문

 
그는 스톤을 곧게 펴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 0.5미터 정도 옮겼다.

가울랜드는 또한 당시까지 가장 과학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이전 100년 동안 작업보다 스톤 건립 과정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밝혀냈다.

1920년 복원 작업에서 인근 올드 사룸을 발굴한 윌리엄 홀리William Hawley는 여섯 개 스톤 기단과 바깥쪽 도랑[해자]을 발굴했다.

그는 또한 커닝턴이 남긴 슬로터 스톤 소켓에서 포트 와인 한 병을 발견하고, 둑 안에 있는 오브리의 구덩이를 재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사르센 서클 외부에 있는 Y 및 Z 구멍이라고 일컫는 동심원형 구멍을 찾아냈다.

리처드 J. C. 앳킨슨, 스튜어트 피곳, 그리고 J. F. S. 스톤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홀리의 작품 대부분을 재발굴해 사르센 돌에 새긴 도끼와 단검을 발견했다.
 

1901년 복원전(왼)과 복원후

 
앳킨슨 연구는 기념비의 세 가지 주요 건설 단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8년에는 세 개 사르센 돌이 다시 세워져 콘크리트 기초 위에 놓이면서 돌들이 다시 복원되었다.

마지막 복원은 사르센 서클의 23번 돌이 무너진 후 1963년에 이루어졌다.

23번 돌은 다시 세워졌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세 개 돌을 더 콘크리트로 쌓았다.
 

1906년 여름, 필립 헨리 샤프Philip Henry Sharpe 소위가 왕립 공병대 풍선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 Christopher Chippindale과 영국 서부 대학교 Brian Edwards를 포함한 후기 고고학자들은 대중에게 다양한 복원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였으며 2004년 English Heritage는 진행 중인 작업의 사진을 책 Stonehenge: A History in Photographs에 포함했다. 

1966년과 1967년, 현장에 새 주차장이 건설되기 전, 페이스와 랜스 바처Faith and Lance Vatcher 부부는 돌 바로 북서쪽 지역을 발굴했다.

그들은 기원전 7000년에서 8000년 사이로 추정되는 중석기 시대 기둥 구멍과 10미터(33피트) 길이 울타리 도랑을 발견했다.

울타리 도랑은 V자 모양으로 잘린 도랑으로, 목재 기둥이 썩을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후 항공 고고학을 통해 이 도랑은 스톤헨지 서쪽에서 북쪽으로, 대로 근처에서 뻗어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1978년 앳킨슨Atkinson과 존 에반스John Evans는 다시 발굴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바깥쪽 도랑에서 스톤헨지 궁수 유해를 발견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스톤헨지의 항공 사진

 
1979년, 실수로 길가에 케이블 매설용 도랑을 파서 힐 스톤 옆에 새로운 돌 구멍이 드러난 후, 힐 스톤 옆에서 구조 고고학 발굴이 필요해졌다.

이하는 생략하거니와 위키피디아 영문항문 기술에 보이는 근대기 이래 스톤헨지를 둘러싼 역사 정리다. 

유의할 점은 우리한테 익숙한 스톤헨지는 말할 것도 없이 끊임없는 땜질 보수 복원의 결과물이며
그 과정에서 바닥은 콘크리트를 깔았다는 사실이다. 
 

1958년 복원 작업. 바닥 흰 가루가 콘크리트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콘크리트 깐다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원형 훼손이라고. 

원형?

원형이 대단한 줄 안다. 

원형은 허약하기만 하다. 
 

1958년의 복원작업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