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대동보6 다음번 대동보는 가능할까? 일제시대 우리나라 출판물 발행 1위가 무엇이었을까?바로 족보였다. 우리는 문학 동인지나 잡지나 아니면 이광수 춘원의 소설 아니었을까 싶지만일제시대 베스트셀러 1위는 대동보였다. 일제시대에도 이미 수십 만을 거느린 대 씨족이 출현한 바이곳에서 전체 씨족으로부터 수단하여 대동보를 찍어내게 되면수만 부 판매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19세기 족보만 해도 씨족에 따라서는 족보에 "서자"라는 딱지를 족보에 떡 하니 붙여 놓고는 하였는데, 20세기 족보에서는 그런 딱지는 전부 사라졌다. 그런 딱지를 붙이다가는 같은 문중 사람들의 항의는 둘째 치고, 대동보 판매도 장담 못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대동보나 파보는 틈만 나면 찍어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2025. 10. 5. 대동보는 망각과 타협의 결과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 특정 문중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가공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느 집안이나 흔히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우리는 문중의 옛날부터 뭔가 대동보 비스무리한 족보가 있어이것이 확대되면서 지금의 대동보 모습을 갖추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족보도 사람의 기억의 산물인지라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어 있고내 주위는 많이 알고 멀어지면 모르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족보라는 건 결국 망각과의 싸움이라 제때 정리하지 않으면 하나도 기억이 남지않는 것은 옛 어른들이라 해서 다를 바 없다.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 문중으로 알던 사람들은 아닌데 수백년 전에 갈려 나간 동족이라고 하여 족보에 이제부터라도 적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수백년 전 조상의 후손들이니 수.. 2025. 9. 30. 문중은 어떻게 덩치를 키우는가 우리나라 각 문중은 어떤 조상에서계속 자손들이 번창해서 커지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 아닌듯 하다.이건 어느 한 군데만 그런 것이 아니라대개 몸집이 아주 큰 문중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은데 문중이 덩치를 키울 때 우리는 족보를 수단할 때 이름을 새로 넣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실제로 큰 기여를 하는 게 원래 서로 별개 문중이었던 사람들이 우리는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지했다고 합의하고 같은 문중 우산 아래로 모이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금 수십만씩 문중 사람들을 거느린 경우대개 이렇게 여러 개 같은 성 문중이 동일 조상으로부터 갈려나갔다고 생각하고한 문중 별개의 파로 새로 정의하고 세계도를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따라서 문중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면 원래 분적한 집안이 다시 원대 복귀하는 형.. 2025. 9. 29. 홍길동은 왜 항복하지 않는가 흔히 대동보를 통해 자기 문중을 보는 근대적 시각 때문에 문중의 구성원은 모두 평등하며 한 조상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요즘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같은 문중 안에도 많은 다른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형성되며이에 따라 후손들 사이에 서로간에 층서를 형성하게 된다. 위로는 문중의 장손으로 사마시 대과 급제자를 대대로 낳는 집안이 있는가 하면서자도 아니고 얼자라 아예 자손 취급도 못받고 호적에 노비로 숨겨져 있는 자손도 나오게 된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같은 집안이라 해도 위로는 명문 벌열부터 아래로는 노비까지 층서를 형성하며굳이 노비가 아니라 해도 적자와 서자, 장손과 지손간에 구별이 생겨 꼭대기에서 아래까지 층층으로 배열된 집단이 형성되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후기.. 2025. 9. 3. 대동보: 완전한 신분해방을 전제로 한 근대의 산물 우리는 족보, 대동보를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 조선시대의 고물 정도로 생각하지만족보 중 요즘 보급된 대동보는 과거의 고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근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도 썼지만 우리는 동성 친족집단 하면같은 조상 모시고 제사 지내고 제사 후에는 음식 나눠 먹으며 음복하는 형제 친척 정도로 생각하지만 조선시대에 동성친족 집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썼지만, 조선시대는 한번 조상 중에 서자가 끼면 (얼자, 즉 어머니가 천민인 경우에는 이것도 안되었다)그 후손 전체가 금고 되어버리는 지라 과거 합격 자체가 되지를 않으니 (물론 19세기 이전 상황이다)한 마을에 동성집단이 있다 한들 그 안에는 적자 후손인 집과 서자 후손인 집이 공존하며서자 후손인 경우 결코 적자후손과 대등할 수 없음은19세기.. 2025. 8. 30. 대동보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왜냐. 호적을 보면 이때쯤이면 3-5명 정도의 사람들로 구성된 소농 가구가 동네마다 가득하여,이들이 죄다 유학을 칭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이 유학을 칭한다는 건 자신들이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다는 소리다.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는데 족보가 없으면 되겠는가? 19세기 중반부터는 대동보가 초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이전까지는 족보라고 해 봐야 유력 가문 몇몇이 찍어 나눠 가지는 정도의, 아마도 잘해 봐야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문집이나 찍어 돌려보는 정도의 부수였을 텐데 19세기 중반 동네마다 유학을 모칭한 이들로 가득하니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은 이때부터 초호황을 구가하여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 양반.. 2025. 8. 23.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