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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2

문체반정과 군주도통론 정조가 문체반정을 시도한 것은 본인이 도통을 이었다고 자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유교에서는 공자 이후 왕이 도통을 이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도통을 군주인 자신이 이었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낸 양반이 영조, 대 놓고 내가 도통을 이었다고 외친 이가 정조였다. 본인이 도통을 이었고 사문의 수호자를 자임했으니 문체도 고문으로 되돌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도대체가 문체반정을 하겠다고 나선 군주를 근대적 싹수가 보이는 왕이라도 떠받드는 사람들을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도통을 이었기 때문에 사대부들 너희는 입닫고 나를 따라와라. 내가 곧 정의요 황극皇極이니 너희는 싸울 필요도 없다. 나만 따라오면 된다. 이것이 탕평책이고 황극론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땅에서조차 공자 이후 왕이 설치면.. 2024. 1. 28.
유득공이 증언하는 《열하일기熱河日記》 선풍과 그에 대한 꼰대 정조의 반응 열하일기熱河日記 상上(정조를 말함-인용자)이 요즈음의 문체가 비속하고 낮다 하여 여러 차례 윤음綸音을 내려 사신詞臣을 꾸짖고 패관 소설稗官小說을 엄금하였으며 또한 여러 검서관檢書官은 신기神技를 힘써 숭상하지 말라 신칙申飭하였다. 북청부사北靑府使 성대중成大中이 홀로 법도를 좇았기에 매양 그에게 포상을 더하였는데, 내각內閣에 명하여 술자리를 열어 시를 읊어서 그의 출발에 총영寵榮을 내렸다. 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 두 직각直閣과 강산薑山 이 승지李承旨(이서구李書九)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모두 당대 시문의 대가들이다. 검서관은 나와 이 무관李懋官(이덕무李德懋)이 참석하였으니, 지극한 영예라 이를 만하다. 이날 남南 직각은 성상의 뜻으로 편지를 써서 안의 현감安義縣監 박지원朴趾源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하였다... 20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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