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熱河日記
상上(정조를 말함-인용자)이 요즈음의 문체가 비속하고 낮다 하여 여러 차례 윤음綸音을 내려 사신詞臣을 꾸짖고 패관 소설稗官小說을 엄금하였으며 또한 여러 검서관檢書官은 신기神技를 힘써 숭상하지 말라 신칙申飭하였다.
북청부사北靑府使 성대중成大中이 홀로 법도를 좇았기에 매양 그에게 포상을 더하였는데, 내각內閣에 명하여 술자리를 열어 시를 읊어서 그의 출발에 총영寵榮을 내렸다.
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 두 직각直閣과 강산薑山 이 승지李承旨(이서구李書九)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모두 당대 시문의 대가들이다. 검서관은 나와 이 무관李懋官(이덕무李德懋)이 참석하였으니, 지극한 영예라 이를 만하다.
이날 남南 직각은 성상의 뜻으로 편지를 써서 안의 현감安義縣監 박지원朴趾源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가 이미 읽어보았다. 다시 아정雅正한 글을 짓되 편질이 《열하일기》와 비슷하고 《열하일기》 처럼 회자될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벌을 내릴 것이다."
연암은 약관에 글을 잘 지어 이름이 서울에 떠들썩하였다. 이윽고 불우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연경燕京에 사신 가는 족형族兄 금성도위錦城都尉를 따라 열하에 갔다 돌아와서 《열하일기》 20권을 지었는데, 탄식과 웃음, 노여움과 꾸짖음에다 우언寓言이 버무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상기象記〉, 〈호질虎叱》,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등의 글은 극히 걸출하고 기이하여 당대의 사대부들이 전하여 베끼고 빌려 보는 것이 여러 해가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이 마침내 대궐에까지 들어가서 이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연암은 우리들이 평소 친하게 종유從遊하던 분이다. 그는 《열하일기》를 짓고 나서 그 이전에 쓴 글을 모두 없애 버리고, “이 《열하일기》만 있으면 나머지 글은 후세에 전할 것 없다.”라고 하였다.
지금 시골에서 고을살이를 하는 터에 글 상자에는 단 한 장도 예전 원고가 없을 텐데 갑자기 장중한 글을 쓰려 한들 무슨 수로 스무 권이나 되는 양을 채우겠는가.
장중한 글이란 또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기 쉽지 않으니, 불후의 작품으로 자부하는 것이라 한들 악시惡詩의 표본처럼 되고 말 것이니 천하에 낭패스러운 사람으로 연암만 한 이가 없다. 나와 무관懋官은 그저 흉내나 내는 사람이다.
***
이 글을 쓴 사람은 유득공柳得恭(1748~1807)으로 근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한 그의 필기류 문집인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권3에 수록됐거니와 저 인용문도 그에 따른다. 이는 《열하일기》가 당시 어떤 선풍을 일으켰으며 그 여파는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증언이다.
연암이 이끄는 딩가딩가 놀자파 사적 모임인 이른바 백탑파白塔派 일원으로 있으면서 그 오야붕이자 보스인 연암을 위해 굳은 일을 마다 않았다. 왜? 연암은 졸라 부자요 나이도 젤 많고, 무엇보다 경화사족 반남박씨인 반면 다른 친구들은 다 서얼인 까닭이다.
이에서 말하는 사건이 이른바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말한다. 연암이 주도한 글쓰기 방식을 속되고 삿된 것이라 공격하면서 그것을 바로잡아 옛 시대로 돌려놓고자 하는 반동이었다. 시대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다른 데로 흘렀는데, 그걸 굳이 임금이라 해서 때려잡겠다고 나섰지만, 임금 맘대로 되니? 끝났다.
저리 분풀이를 했다 해서 정조가 정말로 저리하지는 않았다. 정조도 알았다. 이미 돌릴 수 없는 일임을 알았고, 읽어보니 졸라 재밌걸랑? 배가 아파서 그랬다. 실제로도 아마 내 기억에 반성문 한 장 받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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